[스크랩] 중도정견(中道正見)
중도정견(中道正見)
앞서 말한, 경을 제정하는 내용 다음에,경에 대해서 어떤중도(中道)적인 안목 또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설법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봐야 하는가,..
바람직한 안목이 무엇인가.하는 내용이다.
그 다음에 미진, 작은 먼지 같은 것과 큰 세계와 부처님이 갖추신 32상 80종호 등은 어떤 안목으로 보는 것이 실상(實相)을 보는가 하는 그런 문제를 이야기 하고 계시는 것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중도정견(中道正見),중도적인 안목으로 반야바라밀도 부처님의 설법도 작은먼지도 큰 세계도 그리고 부처님의 삼십이상도 보아야 하며, 중도정견을 해야 제대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생의 모든것들, 내 주변의 모든 것들, 이 모든것들을 바로 본다고 하는 것,
실상(實相)을 본다고 하는 것은 중도정견으로 보아야 그게 바로 보는 것이다.
치우치면 바로 보는 것이 못된다.
경을 봐도 마찬가지고,부처님도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대부분 치우쳐서 보는 것을 합리화시키려는 말이 많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등 그런 것들이 전부 치우친 소견을 정당화하는 말들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그런 말들을 가차없이 타파하고 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고하여 말하되.'마땅히 이 경은 무엇으로 이름해야 하명며우리들은 어떻게 받들어 가져야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이 경은 이름이 금강반야바라밀(金剛般若波羅密)이다.'여기서 이름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이름으로서 경을 마땅히 받들어 가져라.
이쯤하면 우리는 이미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잘 알고 있는 터라서 더욱 집착이 심할 수 있다.
그때 부처님 당시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금강경은 좋은 가르침이다 하고 그만
그것에 목을 맨다.
어떻게 보면 금강경에 대해 너무 지극 정성으로 받들어 모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금강경을 제대로 이해하는가 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다.
자식을 위한다고 막 그냥 위해주는데 그것이 부모로서 지극 정성에는 틀림없지만,그것이
과연 자식에게 이로운가 하는 것은, 그건 전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가 금강경을 애지중지 하고 하는것은 일단은 금강경에 대해서 지극 정성이다라고 할 수 는 있다......
그러나 금강경을 제대로 이해했느냐고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세상에는 자식된 도리로서 부모를 윈한답시고 마음껏 자기 상식을 총동원하여 부모님을 위해드리지만. 부모에계 좋으냐좋지 않으냐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알아야 한다.
특히 불자들은 그런 문제에 있어서 밝아야 한다.
비불자보다 달라야 한다.
그런 안목으로 보아서, 부모가 일을 해서 건강에 좋고 생활에 활력소가 되고 한다면 일을 하시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자기 체면을 생각해서,사회에서 어떤 사람인데 힘든 일은 하지 마세요.
하는 것은 바로 부모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일이 된다.
자식의 체면때문에, 체면에 영향이 가는가..?
어리석게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
부모가 논일을 하고 밭에 가고 아니면 동네 마을에 쓰레기를 치우는 일을 한다면, 천한 직장에서 일을 한다면, 자식 체면에 손상이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집안이 살 만한데 일을 시키느냐, 그렇게 보는 이웃의 눈도 문제고 또 그 눈에;;
휘말리는 것도 문제다.
저 집자식은 말이지, 사는 것도 괜찮고 돈도 많은데 부모에게 일을 시킨다.
제발 일하지 마시고 집에서 노십시요.
이렇게 하면, 그날부터 건강이 악화되고 생활에 활기가 떨어지고 그래서 그만 병이나고
생활에 재미가 없어서 생명과 삶이 단축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문제가 사회에는 너무 많다.
지금 내가 부모를 위하는 것이 정말 부모에게 보탬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 생각하고,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줄 알고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하는것이다.
자식에 대한 문제나 부모에 대한 문제나 마찬가지다.
또한 금강경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수보리야,해놓고 금강경이란 이름을 툭 던지니까 거기에 다들 머리를 쳐 박고 그곳에만
매달렸으니, 부처님께서 집착을 떼어주기 위해서, 그렇게 이해해서는 금강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까닭에, 부처님이 말하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
그저 편의상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이름뿐이야, 뭐가 있느냐.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중도(中道)적인 안목인 것이다.
경(經)은 우리가 생각할 때 거기에 우리가 집착해서는 안되고, 그렇다고 영 무시해서도 안
되는것, 그래서 부정과 긍정을 동시에 수용하는 그런 안목, 그것이 중도사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래서 이런 말들이 중도(中道)를 뜻하는 것이다.
'산은 산이요,물은 물이다.'라고 하는 법문도 불설반야바라밀(佛說般若波螺密)이 즉비반야바라밀 (卽非般若波羅密)이다.
일단 긍정으로 들어가서 그 다음 말이 즉비반야바라밀(卽非般若波羅密),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그렇게 한다.
그리고 수용반야바라밀(受用般若波羅密)이다.
산은 산일 뿐이고 물은 다만 물일 뿐이다.
긍정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 그것이다.
불교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리잔에 물이 든 물컵을 쥐고 있을때 도둑이 들어오면 우린 그걸 던져서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
던져서 방어를 해야 한다.
물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어하지 않는다면, 아까운 컵인데 하면서 던지지 않는다면,
결과는 뻔하다.
때로는 무기로 볼 수도 있어야 하고 목이마를 때는 물을 마시는 고마운 그릇으로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항상 어떤 입장에 있어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뜻하는 바는 중도(中道)적인 눈을 갖추어서 인생과 세상을 보자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자는 것이 아니고 팔자를 고치자는 것도 아니다.
내 팔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내 안목을 바꾸자고 하는 것이 불교이다.
불교적인 안목 그것을 중도정견(中道正見)이라 한다.
중도적인 것이 바른 소견이다라는 것은 불교에서만이 가르치고 있다.
다른 종교 다른 철학에서는 없다.
중도적인 정견이 바른 소견이다.그런 말이다.
우리 육신이 허망하다고 해서 허망한 쪽으로만 생각하면 허무주의가 되는 것이고,
그렇다고 이 육신 이것이 나의 모든 것이다고 하면 현실주의가 되며 사람이 추하게 보인다.
어디에도 치우치면 그것은 안 된다.
육신은 육신대로 이해하고 허망한 입장은 그 입장대로 잘 이해하여야 한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설법의 문제, 설법한 바가 있는가..?
부처님도 설법이고 수보리도 설법이고 두 사람의 말이 모여서 더욱 더 아주 멋진 설법이고,
이 설법 속에서 설법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면서 설법한 것이 있느냐 하니까..?
뚱딴지 같이, '세존이시여,설법한 것이 없습니다.이렇게 이야기 한다.
앞에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에서도 좀 언급한 바가 있었지만, 여기에서 이 세상에서 제일 작은 먼지를 가지고 한 번 이야기 해보자.
수보리야, 생각이 어떠한가..?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먼지들이 얼마나 많으냐..?
수보리가 말하되, 매우 많습니다.
세상에 제일 작은 티끌먼지를 거론하고 있다.
수보리야, 모든 미진(微塵)은 여래가 말하기를, 미진이 아니고 그 이름이 미진이다.
똑같은 공식(公式),중도(中道)의 공식이다.
긍정,부정,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수용하는것, 고단위 삼단계다.
이것이 삼단논법(三段論法)과 거의 유사하다.
긍정,부정,그다음에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수용하는것. 그것이 뭔고 하니,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먼지들이건 긍정이며, 여래설비미진(如來說非微塵)이것은 부정이다.
이름이 미진이라고 했기 때문에 꼭 미진이라는 것도 아니고 꼭 미진이 아닌 것도 아니고 이름이 미진이라고 하는 것은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수용하는 것이 된다.
그래 산은 산이라고 하면 긍정이고,산은 산이 아니다 하면 부정이다.
그 다음에 다만 산은 산일 뿐이다하는 것은 거기에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포함되는 것이다.
부처님 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32상(相)으로써 여래를 보느냐..?
아닙니다,세존이시여,가히 32상으로 여래을 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썩어질 몸뚱이고 또 불에 태우면 한 줌의 재로 남는 그런 허망한 것을 가지고 여래라고 할 것이 있느냐,.?
여래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런 차원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여래가 설한 32상은 즉 32상이 아니요 그 이름이 32상이다.
바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요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고 하는 형식하고 똑같은 말씀이다. 앞으로 똑같은 말이 몇 번씩 나오는데 정말 모든 것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마음의 문제들이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어떠한 물질의 문제이고 간에 전부 이렇게 봐야 제대로 보는 것이다.
소리가 있다고 하자.
있다고 하면 그때 그만 소리는 없어지고 만 상태다.
귀 끝이 쟁쟁하게 욕하는 말은 벌써 사라진 지 오래인데 두고두고 기분 나쁜것.....
그 것이 참 묘한 것이다.
그걸 없다고 해야 옳으냐,있다고 해야 옳겠느냐..?
불교에 '있는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다'라는 그 말같지도 않은 말이 가장 명언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우리 마음의 희,노,애,락,감정의 문제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형상의 문제를 꿰뚫어 보는 소리이다.
있는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그 이름이 있는 것이다.
있는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야!..색즉시공(色卽是共),공즉시색(空卽是色),
짧은 반야심경이다.
이 역시 중도(中道)적인 안목을 제대로 표현한 그런 것이다.
옛날 우리나라 역사상 이조(李朝)오백년 동안에 삼십여 년간 재상 노릇을 한 그 유명한 재상,
재상 중에서도 제일 재상노릇을 잘 했다고 하는 황희정승이란 분이 있다.
그 분은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싸웠던 경위를 이야기하면 갑(甲)이라른 사람이 을은 나쁜 놈
이라고 하면"그래 그래 너 말이 맞다'하고,또 을(乙)이라는 사람이 와서 말하면 '그래 자네 말이 옳다'고 하였다 한다.
정승이지만 워낙 가난하게 살았다.
청정하게 법도를 제대로 지킨 분이다.
저 사람 말도 맞고 이 사람의 말도 맞다고 아니까, 옆에 듣고 있던 부인이 당신은 갑이 와서
말하면 그 말을 인정하고 또 일이 이야기하면 또 을이라는 사람을 인정하니 도대체 왜 그러냐고 하니까.'부인의 말도 옳다'그랬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도(中道)다.
다 수용하는 것, 그렇다고 치우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게 죽일 놈 살릴 놈 하면서 그렇게 치우치는 건 아니다.
다 수용함으로 일리는 있다고 봐야 한다.
하나의 이치는 다 있다는 것이다.
100%옳은 것은 아니지만 황희 정승이 그렇게 된 것은 그 사람인생의 역정 때문이라 한다.
고려왕조가 멸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새로 건국 하였다.
그리고 2년후 과거시험을 치루어 유생들을 뽑아 모집하려 했으나,머리가 나쁜 유생들만 모이고 개성에서 유명한 머리 좋은 유생들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한 그룹의 선비들이 도포자락을 휘날리면서 어느 산중으로 들어갔는데,그 곳이 '두문동,으로,바로 이씨 왕조를 반대하고 고려에 충정을 가지고 산으로 들어가는 선비들,
똑똑하고 절개 있는 선비들이었던 것이다.
그 두문동,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거기서 나왔다.
두문동에 72인의 선비,사실은 73인이 들어갔다 한다.
그런데 아무리 나오라고 회유를 해도 나오지 않으니까 할 수없이 불을 질렀는데,
그 불지른 마당에서 73인이 회의를 해서,'오늘의 이 가슴 아픈 역사를 누군가 후세에 전해야 한다.이 일을 정말 제대로 전할 사람이 누구냐..?
덕망이 있어야 하고 이씨 왕조 밑에 들어가 벼슬을 해서 살더라도 정말 우리들의 정신을,
꼿꼿한 선비의 정신을 그대로 전해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누가 한 사람 여기서 희생물이 되라.
72명을 배신하고 희생물이 될 사람이 누구냐..?
그리고 희생물이 될 그런 용기가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투표를 했다.
아무도 지원하는 사람이 없어서 황희가 뽑힌 것이니,할수 없이 황희는 눈물을 머금고 72인의 뜻을 이어서 72인을 배신하고 내려온 것이다.
72명은 다 타 죽어버리고 혼자 내려와서 결국은 태조 이성계 밑에서 정승 노릇까지 하고, 30년을 그 몇대까지 세존 임금 때까지 했는가 그랬던 분이다.
오랫동안,30년을 그 몇 대까지 세종 임금 때까지 했는가 그랬던 분이다.
오랫동안,30년 가까운 정승벼슬을 하면서 그 모든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해 남겼다 한다.
그 서릿발 같은 동료 유생 72명이 불에 타서 생화장 되는 모습을 두 눈 뜨고 그 아픔을 견디고
살아왔으니,. 그사람 속이 어떻겠는가..?
속이 타도 수천 번을 탔을 것이고 속이 썩어도 수백 번 썩었을 것이다.
그런 인욕(忍辱)을 했다면 도가 통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 정도의 인생 경험이 있는 사람이, 사람들의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면 옳다 그르다 할게
뭐가 있겠는가..?
자네 말도 옳고 또 자네말도 옳네, 시시비비 가려봐야 아무 것도 아닌 거지.
그런 큰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사람은 큰 상처로 속이 썩으면 어지간한 것은 수용하게 되는 것인데,
다른사람이 보면 아주 사람이 좋고 너그럽고 아주 큰 인물로 보이는 것이다.
자네도 옳네 하는 그 말은 불교의 중도(中道)적인 그런 안목,그런 소견을 잘 실천하는;;
사람이 아닐까. 그런 생각에서 예를 든 것이다.
불설 반야바라밀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
네가 옳다고 하는 것이 결코 옳아서가 아니고 그 말을 하자면 옳다는 것이다.
수보리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강의 모래 수 같이 헤아릴수 없는 목숨으로 보시했다.
참으로 상상도 하기 어래운 그런 큰 희생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이 경(經)가운데서 경전 전체거나 사구게 하나만 수지 독송하여 남을 위해서 해설해 준다면,그 복이 매우 많다고 그랬다.
더 많다고 하지 않고 매우 많다고 했다.
인간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한두 번의 생명이 아니고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은 그런 생명이다.
공덕이 크다라고 하는 것은 당연하겠으나 사실 살을 애는 그런 표현인 것이다.
금강경 사구게를 수지(受持)해서 위타인설(爲他人說)하면 그 복(福)이매우 많으니라.
이 시대에 정말 불교가 해야 할 일 또 불자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 바로
정법구현(正法求顯)이다.
부처님의 정법(正法)이 이땅에 살아나야, 또 빛을 발해야 바람직한 세상이 될 것이다.
그래서 정법에 대한 소중함을 이야기한 것이다.
여법수지(如法受持),금강경의 이름이 드러나서,금강경의 인연(因緣)으로 해서,
설법미진세계(說法微塵世界) 삼십이상(三十二相),이렇게 중도(中道)적인 안목으로
보아야 바로 본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