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심해의취(深解義趣)
심해의취(沈解義趣)
이시 (爾時)에 수보리가 문설시경(聞說是經)하사옵고 심해의취(深解義趣)하야 체루비읍(涕漏悲泣)했다.
그때 수보리가 이 경전 설하심을 듣사옵고, 심해의취(深解義趣)그 경속에서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도리 또는 진리의 이치와 같다.
이런 깊고 깊은 이치, 정말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모든사물과 사건을 꿰뚫어 보는 대로
깊이 이해합니다.
그냥 머리로 이해한 것이 아니고 정말 가슴으로 감동 했다는 것,
심해(深解)라고 하는 말은 마음 깊이 감동 했다는 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실 교리를 많이 알고 경전을 외우고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없어서 하기는 하지만, 무엇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목적인가 하면,
중생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듣고 감동하도록 하는 데 그 뜻이 있는 것이다.
심해(深解),깊이 이해하는것, 천수경에도 보면 아금문견(我今聞見)득수지(得受持),,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意),여래의 진실한 뜻을 알기 원하나이다.
그 안다고 한다는 것이 심해(深解)이다.
깊이 이해한다,
감동한다.
참으로 그 가르침이 우리 삶에 도움이 되겠다.
두고두고 도움이 되겠다.
이렇게 알든지 아니면 정말 아주 깊은 가슴으로 감동을 하든지 ;;
그런 점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교리를 잘 알고 경전을 잘 외우고 불교의 사찰에 출입하고 하는 온갖 그런 행법(行法),
그런 행동거지 예법(禮法)을 잘 아는것은 물론 옳고 좋다.
하지만 그것 보다 우선하는 것은 부처님의 주옥같은 가릍침에 우리 가족이나 이웃이나 누구든 감동해서 움직이게 되고 자신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감동하고 우리 자신을 움직이게 되었을 때 뭔가
신심(信心)이 나게 되어 있고, 경을 읽고 싶게 되고 더욱 연구하게 되어 있고 저절로 따르게
되어 있듯이, 내가 감동하는 사람에게도 무엇이든지 다 바치고 싶고 무엇이든지 다 해주고
싶고 그 사람 때문에 잠도 오지 않고 하는 삶의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그런 감동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걸 바라시고 계신다.
그래야 우리가 조금씩 조금씩 달라질수 있다.
그냥 머리로 생각으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대충 해서는 사람이 움직일 수 가 없다.
감동시킬 수가 없다.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다.
사실은 이런 공부의 시간을 우리가 자주 가짐으로 해서 그런 기회가 오는 것이다.
경전을 설한 지금까지 내용이다.
그 중에서 딱 한가지를 내세운다면, 부처님이 참으로 훌륭한 분이 되는 것은 32상때문인데,
그 32상에 대해서 '32상(相)이 32상이 아니며 그 이름이 32상이다'라고 한 것이다.
32상에 대한 아난의 관념이 다 무너지는 순간이다.
왜 출가했느냐고 부처님이 아난에게 물으시니까, 아난이 대답하기를,'부처님이 너무 잘
생겨서,저렇게 생긴 모습은 세속적인 그런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저도 부처님처럼 잘 생기기 위해서, 그 모습에 감동해서, 이렇게 출가했습니다'라고
하는 그런 대화가 있듯이, 부처님 모습에 대해서 우리는 상당히 상견(上見)중생이다.
그렇듯이 우리 중생들은 그것이 약점이기도 하다.
상견중생(上見衆生),일단 눈에 딱 들어오면 눈으로 보는 데서 거의 칠팔십 프로 감동을
한다든지 짐작을 한다든지, 그 사람에 대해서 겉모습만 보고 일단 ,,
자기 나름대로 짐작해 버리기 십상이다.
예를 들어 내가 승복을 입으면,일단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스님으로 보는 것처럼
모습만으로 판단한다.
일단 그 사람의 속은 뒷전이고 다음 문제이다.
대개 우리는 이렇게 살아간다.
아난존자 같은 뛰어난 부처님 제자도 부처님의 잘 생긴 모습을 보고 출가했을 정도니,..
그 삼십이상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대단한 것일 것이다.
그런데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삼십이상이 삼십이상이 아니라 그 이름이 삼십이상이다.
그 동안 내가 애지중지 하던, 정말 마음속에 그리던 부처님의 삼십이상에 대한 그런 존경심이랄까,, 거기에 대한 관념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그 속에 더, 어떤 형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더 깊은 뜻,더 위대한 뜻이 있다고 하는것이
의취(義趣)라고 볼수 있다.
제13분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에서 보면,금강경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 목숨보다도 훨씬 가치가 있다.
수보리야, 선남자 선녀인이 이항사등신명(以恒河沙等身命),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은 목숨으로 보시(布施)했다고 하자, 그리고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사구게(四句偈)만 가지고도
남을 위해서 설해 주거든 그 복이 심다(甚多),매우많다. 더 많다라는 그런 뜻이다.
이런 말에는 우리가 감동하게 된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가..?
체루비읍(涕漏悲泣)이라, 눈물을 뿌려서 슬피 울었다 이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