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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娘生寶藏 2011. 9. 8. 12:49

 

 

부처님의 일상생활은 걸식이었다

 

지금도 남방불교(南方佛敎)인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 같은 곳에서는 부처님 당시처럼 스님들이 걸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한국, 일본 등의 북방불교(北方佛敎)에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맞지 않기 때문에 사찰에서 밥을 지어서 먹고 집단적으로 생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시내에서 걸식하고 다시 산으로 올라와야 하는 등 동남아 지역과 수행생활의 조건이 다르다. 더운 지방인가 추운 지방인가에 따라 형태가 달라진 것이다.

 

여기 첫 대목에 걸식(乞食)한다는 말, 밥을 빌었다는 말은 아주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다. 금강경의 전편에 흐르는 주된 사상(思想)이 걸식이라는 이 말에 은연중에 표현되고 있으니, 잘 참구(參究)하여 본다면 구체적인 부처님의 행방을 통해서 금강경의 사상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육조혜능(六祖慧能)대사는 부처님과 다를 바 없는 훌륭한 큰스님이시다. 육조 스님께서는 금강경이 무상(無相)으로 위종(爲宗)을 삼는다고 하셨다. ()이 없어야 한다. 상이 없음으로서 으뜸으로 삼는다. 무상이라는 것은 모양 상(), 형상 상()이다.

 

그래서 형상이 없다. 우리 마음에 상이 없는 것으로서 으뜸으로 삼는다라고 큰스님께서 명명하신 것이다. 이 말이 금강경을 잘 표현하는 뜻으로 여겨진다. 육조 스님께서 그렇게 판단하신 이후로 누구나 무상(無相)으로서 금강경을 해석하고 있다.

 

무상(無相)으로 으뜸을 삼는다.

 

그러면 무상이란 무엇인가? 상이 없는 것, 상을 내지 않는 것, 낼 상이 없는 것, 날 때부터 상이 없다는 등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상을 내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낼 상이 있어도 우리가 참는 경우이다.

아예 낼 상이 없다는 것은 아예 낼 상이 없다고 하는 이치 그런 이치를 아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나에게 아예 상이 없다는 의미도 되는 것이다. 내 자신에 상이라는 것이 없어졌다는 것이 무상이고 상은 있지만 상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 보통 우리 중생들이 실천하는, 그 정도의 단계로 무상이 해석되어지고 있다.

 

한 차원 높은 말로는 아예 상이 없다는 것이다. 낼 상이라는 것이 나에게 없다는 것이 아니고, 상이라는 것을 근본적으로 따져 보고 지혜의 눈으로 꿰뚫어 봄으로서 상이라는 것이 아예 없다, 나에게만 없는 것이 아니고 꿰뚫어 볼 줄 아는 이 입장에서 볼 때 상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금강경을 잘 깨달아 터득해야 할 목표이며 화두(話頭)일 것이다.

 

금강경 전편의 사상이 무상(無相), 무상사상이라 할 때, 걸식(乞食)이라는 것이 무상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부처님은 일생을 걸식을 통해서 사셨고, 지금도 남방불교에서는 스님들이 걸식을 하고 계신다. 우리 북방불교에서는 걸식을 하지는 않지만 걸식에 가까운, 즉 신도님들의 시주(施主)에 의해서 살아가니 일종의 걸식이 아니겠는가. 걸식의 정신은 우리가 시주를 받아 밥을 해서 먹든지 직접 마을에 나가 밥을 먹든지 역시 그 정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서 걸식이 왜 무상과 관련이 있느냐? 걸식이라는 것이, 우리 속담에 삼일 굶어서 도둑질하지 아니할 사람이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차라리 도둑질을 하더라도 얻어먹는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무상을 으뜸으로 하는 금강경에서 부처님의 일상생활인 보편적인 걸식(乞食)을 왜 등장시켰는가? 다른 경전에서는 걸식이라는 이야기가 거의 없다. 율문(律文)에서나 걸식의 주의사항이나 규칙이 있지만, 다른 경전상에는 거의 없다.

 

화엄경을 설하시고 모든 경전을 설()하신 날도, 부처님은 굶으신 것이 아니다. 그 전날도 걸식을 하셨고 그 날도 역시 걸식을 하셨고 그 이튿날도 걸식을 하셨을 것이다. 부처님의 일상생활이 걸식이다. 그런데도 다른 경전에는 걸식이란 말이 없는데 왜 금강경, 그것도 서론에 걸식이라는 말을 등장시켰느냐 하는 것을 우리는 잘 볼 줄

 알아야 한다.

출처 : 사리암
글쓴이 : 만년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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