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강백무비스님강의·무불스님엮음금

[스크랩] 제15.경을 지니는 공덕/소견이 터져야 한다.

娘生寶藏 2011. 10. 18. 08:23

소견이 터져야 한다

 

             수보리야,왜 그러냐,,?

약요소법자(若樂小法者)착아견인경중생견수자견(着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일새,만약에 소법(小法)을 좋아하는 사람,그러니까 너무 자기의 어떤 기준,

자기가 살아가는 어떤 틀에만 매여가지고, 그 이상의 것은 볼 줄 모르고,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괴로워하고 속상해하고 울고불고 그러다가 급기야

큰일까지 저질러 버리는 좁은 사람, 자기 중심적인 사람, 그런 사람들은 이런 아견(我見).인견(人見).중생견(衆生見).수자견(壽者見)에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이 경전을 능히 듣고 받아 가지고 수지하고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해

설하지 못할 것이다.

 

자기 소견에 꼭 매여서 꼼짝달싹 못하고,자기 소견에 맞지 아니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하고, 금강경이 어려워서 공부 못했다.

무슨 말씀인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등등,

공부할 신심이 나지 않으니 남을 위해서 이야기해 준다는 것은

더욱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 이다.

자신이 납득이 되지 않는데, 어떻게 남을 위해서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소견이 터져야 한다.

살림 사는 데 눈이 보배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소견이 터져야 한다.

 

옛날 조사 스님들께서 그랬다.

네가 행동을 어떻게 하던지 관심갖지 않겠다.

눈이 어두우냐 밝으냐에 대해서만, 눈 밝은 것 하나만 본다 그러셨다.

눈 밝은 것이 뭔가..?

소견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역시 소견이다.

행동은 과거 생에 익힌 업에 의해서 고쳐지기가 쉽지 않겠지만,

그러나 안목이 밝아지면 행동고치는 건 그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안목만 제대로 있어지면 행동은 금방 고쳐지게 되어 있다.

얼음 덩어리가 물인 줄 아니까, 놔두고 시간이 가면 녹으니까.

시간만 지나면 녹는 줄 이미 안다.

 

놔두고 시간이 가면 녹으니까,시간만 지나면 녹는 줄 이미 안다.

얼음이 물인 줄 모르는 사람은 물로 쓸 줄 모른다.

우리가 안목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이와같이 얼음이 물인 줄 아는 그런 소견이다.

 

우리가 이치에 대해서 확연히 아는 것이 우선이다.

얼음이 물인 줄 아는 것이 우선이다.

'말을 번지르하게 하면서 행동은 개차반이다'라는 그런 소리를 잘 쓴다.

그래도 그런 사람은 고칠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다.

소견을 들어보면 괜찮은 소리거든,그런 사람은 머지않아 고쳐진다.

그러나 소견이 꽉 막힌 사람,소법(小法)을 좋아하는 사람,

꽉 막힌 사람은 참 문제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소견이 트여야 한다.

하지만 소법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차별의식.열등의식.한계의식.등이  많아서 안 된다.

 

나이에 대한 관념을 수자견(壽自見)이라 한다.

그리고 중생이 한계가 있지.중생이 무슨 부처가 될수 있느냐,,?

그런 쪼그라드는 생각을 중생견(衆生見)이라 한다.

 

 

왜 중생인가..?

소견은 멀쩡한데, 부처가 있는데,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중생이 가진 한 마음속에는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丑生).인도(人度).

아수라(阿修羅)등 여섯 가지 범부(凡夫)가 있는가 하면,

 성인(聖人)의세계인 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

부처(佛)등 네 가지의 세계가 함께있다.

사생(四生) 육도(六度)라고 해서 중생의 세계와 성인의 세계가

우리의 한 마음속에 다 들어있는것이다.

금강경 공부하는 순간에는 다 성인이 되었다가,

밖에만 나가면 축생이 되든지 아수라가 되든지 알수가 없다.

배가 고파서 껄떡거리는가 하면, 자기 분수에 맞지 않게 껄떡거리며

 배고파서 굶주린 귀신처럼 살고 있다.

중생 사람의 속성이 나온다.

걸핏하면 치받으려 하고 낯선 사람 오면 경계부터 하고,

몇 마디 말이 오가면 발끈해서 네 잘났니 내 잘났니 싸우면서

 아귀의 속성으로 돌아온다.

 

성인(聖人)의 말씀을 공부할 때는 누구나 다 성인이 되는 것이다.

불교 공부를 하는 순간은 우리는 다 성문(聲聞)이며 성인의 타임에

들었다고 보아진다.

우리 마음속에는 부처가 있고 보살도 들어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한 번씩 부처 행동을 하라.

한 번 부처 행동을 하자.

한 가지 행동을 부처답게 하면  그 한번은 부처다.

공부하는 동안만은 성문이다.

열심히 경전의 말씀,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으니까 성문이다.

속에는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성문이다.

우리가 예를 들어 곱추 흉내를 내면 5분 동안 곱추 인생이다.

5분 동안 부처 행동을 하면 그 동안은 부처다.

 

필자는 평상시 일행일불(一行一佛)사상을 주장한다.

한 번의 부처 행동으로  한 부처를 이루다.

대승경전을 보면 사람은 본래 부처도 갖춰져 있고 보살도 갖춰져 있고,

아귀.축생. 아수라도 갖춰져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부처의 행동을 해보는 거다.

한번 두번 세번 이렇게, 하루에 행동이 천 가지라면,

하루에 한번은 부처행동을 해 보는 거다.

 

 내일은 두번 세번 이렇게 자주 하다보면, 프로테이지가 자꾸 높아지다 보면

100%도 되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이 아니겠는가..?

골똘이 오매불망해서 깨달음을 이룬 뒤 부처가 되려고 하는 것은 이 시대

사람들에게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런식의 깨달음이라는 것은 어렵다.

그러니까 소법을 좋아하지 말고,

소견을 우리가 좀 잘 알고,

중생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나이 들었다고 하는 그런 한계의식도

사로잡히지 말고, 좀더 대법(大法)을 좋아하자.

대승(大乘)에대한 마음을 바로 한 사람을 위해서 설했고,

 최상승에 대한 마음을 바로 한 사람을 위해 설했다.

출처 : 무불스님
글쓴이 : 길상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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