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부추밀(富樞密)에게 보낸 대혜선사의 답장 1-2
부추밀(富樞密)에게 보낸 대혜선사의 답장 1-2
畢竟에 喚甚麽하야 作知解며 知解는 從何而至며 被障者는 復是阿誰오 只此一句에 顚倒有三하니 自言爲知解所障이 是一이요 自言未悟하야 甘作迷人이 是一이요 更在迷中하야 將心待悟가 是一이니 只遮三顚倒가 便是生死根本이라 直須一念不生하야 顚倒心絶하야사 方知無迷可破며 無悟可待며 無知解可障이니 如人이 飮水에 冷煖을 自知라 久久하면 自然不作遮般見解也리라
본문 ; 필경에 무엇이 알음아리가 되며, 알음아리는 어디로부터 오며, 장애를 입는 사람은 또 누구입니까? 다만 이 한 구절에 전도(顚倒)된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스스로 알음아리가 장애가 된다고 여기는 것이 그 하나요, 스스로 아직 깨닫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미혹한 사람을 달게 짓는 것이 그 하나요, 다시 미혹한 가운데 있으면서 마음으로 깨닫기를 기다리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다만 이 세 가지 전도가 곧 생사의 근본입니다. 곧바로 모름지기 한 생각도 생기지 아니하여 전도의 마음이 끊어져야 비로소 가히 깨트릴 미혹이 없으며, 깨달음을 기다릴 것이 없으며, 장애하는 알음아리가 없음을 알 것입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물을 마시어 차고 따뜻함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오래오래 하면 자연히 이러한 견해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강설 ;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이 알음아리는 무엇인가? 자기 자신이다. 알음아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역시 자기 자신에게서 온 것이다. 장애를 입은 사람도 역시 자기 자신이다. 모든 문제가 오직 자기 자신 하나뿐인데 그것을 나누어 놓고 분별을 하다 보니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깨달았느니, 미혹하다 느니.” 라고 분별하는 것도 하나인 자기 자신위에 건립한 가건물 일뿐이다. 깨닫기를 기다릴게 무엇인가? 지금 바로 그 자리인 것을. 자기 자신 위에는 미혹도 깨달음도 장애가 되는 알음아리도 아무 것도 없는데 대혜 선사는 이러한 입장을 두고 보내온 편지를 읽으니 모순이 그렇게 많이 보이는 것이다. 진실로 “사람이 물을 마시어 차고 따뜻함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을”뿐이다. 밥을 떠서 먹여준들 어찌 그 맛을 알겠는가. 스스로 고민하고 스스로 사유하고 스스로 바로 보는 수행을 통해서 납득이 될 뿐이다. 이어서 대혜 선사는 “오래오래 하면 자연히 이러한 견해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간화선의 창시자인 대혜 선사는 분명히 점수(漸修)를 주장하는 선사임을 엿볼 수 있다. 돈오돈수(頓悟頓修)만을 집착하여 고집할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