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화엄경 노트 (1-2 세주묘엄품 제1의1 /시성정각, 장엄)
大方廣佛華嚴經 卷 第一
唐于闐國 三藏沙門 實叉難陀 譯
韓國 金井山沙門 無比 懸吐科目
序分
毘盧遮那의 成佛
擧果勸樂生信分
第 一會 六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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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부터 화엄경의 첫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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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광불화엄경 권 제1(大方廣佛華嚴經 卷 第一); 전통적으로는 제1권 하지 않고 권 제1이라고 한다.
당우전국 삼장사문 실차난타 역(唐于闐國 三藏沙門 實叉難陀 譯); 산스크리트어로 된 경전을 실차난타라고 하는 분이 번역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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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의 본(本)이 몇 가지가 되는가 하는 것도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 될 것이다. 일단 우리가 공부하는 교재는 강원에서 제일 많이 보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이 보는 80권본 화엄경이다. 새로 번역했다고 해서 신역화엄경이라고도 하고 당에서 번역했다고 당역화엄경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우전국 삼장사문 실차난타라고 하는 인도사문이 번역을 했는데 우전국은 화엄경을 편찬한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중국 위구르 자치구에 속한다. 지금은 중국 지도상에 화전(和田)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도시다.
당나라 때는 이 지역이 모두 인도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서역이었다. 당시 중국에는 이미 화엄경 60권본이 번역되어 있었지만 화엄경을 좋아했던 측천무후의 명으로 보다 완전한 화엄경 을 번역하기 위해 80권본 화엄경을 가져와서 실차난타라는 이가 번역을 했다고 전해진다. 실차난타라는 분은 우전국 사람이다. 개인 인물에 대한 설명 역시 다음기회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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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금정산사문 무비 현토과목(韓國 金井山沙門 無比 懸吐科目); 토를 달고 과목을 새롭게 정리를 했다. 전통강사가 이것을 보더니 깜짝 놀라면서 ‘화엄경 이렇게 정리를 잘해 놔서 거저 먹기구나’하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공부를 할 때는 목판본 화엄경이었다. 새까만 한문만 꽉 찬 그 경은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끊어지는지 전혀 분별하기 어려웠다. 단락이 나뉘어져 있어도 그 단락의 내용이 도대체 무엇인지, 간추리면 무슨 뜻인지도 분별이 없었다. 그러한 것을 8자, 10자, 한 줄 또는 두 줄 어떤 경우는 한 페이지의 분량을 내용에 따라 단락으로 나누고 뜻을 고려하여 과목을 올렸다. 이해하기 쉽게 편찬하였기 때문에 목판본으로만 공부한 전통강사가 깜짝 놀란 것이다.
이렇게 하는 동안 나에겐 공부도 많이 됐지만, 애도 많이 썼다. 30여 종류의 책을 냈지만 가장 공들인 책이 바로 이 책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고, 서툰 점도 있고, 틀린 곳도 있을 것이다. 과목을 참고로 이런 내용이구나 하고 안다면 단락단락의 뜻을 파악하는데는 상당한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一, 世主妙嚴品 第一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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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 두두물물이 세상의 주인이다. 그들이 아름답게 장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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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 약찬게에 ‘삼십구품원만교 풍송차경신수지’ 라는 대목이 나오듯이, 화엄경은 총 39품으로 이루어졌다.
그 첫 품의 이름이 세주묘엄(世主妙嚴)이다.
‘세상의 주인이 아름답게 장엄을 했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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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자리에는 많은 스님들이 앉아 있다. 개개인의 인생이나 승려생활이 어떻든 바로 이 자리에서는 그 나름대로 전부 자기 몫을 하고 있고, 제 자리에 앉아 있고, 자기 인생을 살아간다. 그분의 입장에서는 그가 세상의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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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전부 ‘나’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 두두물물이 전부 자기 중심이다. 그래서 다 잘났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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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이삭을 보더라도 그렇다. 우리는 쌀은 소중하고 겨는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쌀을 중심으로 보기 때문이다. 겨의 입장에서는 겨가 주인이다. 벼뿌리 입장에서 보면 뿌리가 없으면 싹이 맺히지 않는다. 잎의 입장에서 보면 잎이 있기 때문에 태양빛을 받아들이고 온갖 작용을 해서 쌀이라고 하는 곡물을 만든다. 뿌리는 뿌리가 주인이고 잎은 잎이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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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은 새로운 시각에서 불교를 이해하고 인생을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화엄경의 눈으로 세상을 볼 때 세상의 주인이 되어 아름답게 장엄한다는 것은 사람은 사람대로 동물은 동물대로 식물은 식물대로 광물은 광물대로 사물이나 사건이나 전부 이 세상을 아름답게 장엄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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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을 예로 든다면 아무리 사람이 많이 다치고 피해를 주더라도 지진의 입장에서는 멋진 기지개를 한 번 켰을 뿐이다. 그런 것을 우리가 이해해야 한다.
화엄경 약찬게는 화엄경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거기에 보면은 주풍신 주공신 주주신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야차 등등 별별 신장들이 등장한다. 방대한 화엄경을 압축하여 게송으로 읊은 약찬게에 수많은 신장들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그들이 우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두두물물 모든 존재가 세상의 주인이고, 세상을 아름답게 장엄하고 있다.
모두는 하나하나 독립된 입장으로서 화엄세상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할 때 인생을 보람있게 살고 가치있게 살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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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두물물이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전부가 세상의 중심이고 주인이다. 그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꾸민다. 이것이 세주묘엄품의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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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화엄경 입장에서 보면 무엇이 옳고 그르고, 무엇이 있어야 하고 없어야 한다는 것은 없다.
일등과 꼴찌가 동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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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담을 쌓는데 큰 돌만을 쌓다가 작은 돌이 필요해졌다. 마땅한 작은 돌이 없다면 큰 돌을 깨서 작은 돌을 만들 수 밖에 없다. 무엇이 중요한가. 작은 돌인가 큰 돌인가.
그 중요성을 똑같다. 작은 돌이라도 큰 돌과 중요성을 똑같다. 이것을 이해하고 인생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화엄경의 주된 뜻이다. 그렇다고 단순하게 이로써 화엄경의 공부가 다 끝났다고 이해하면 넌센스가 된다.
一, 始成正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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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성정각(始成正覺); 비로소 정각을 이루다.
불교의 모든 것은 깨달음에서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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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오직 깨달음으로부터 시작했다.
법당이다 불상이다 불교 미술이다 염불이다 목탁이다 죽비다 가사다 발우다 등등 불교의 일체는 시성정각으로부터 비로소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천칠백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도 그 일원이 되어 동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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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 불교의 세계는 시성정각이다.’ 이 말은 화엄경답고 근사하다. 화엄경만 제대로 공부를 하면 불교공부는 다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경문]
如是我聞하사오니 一時에 佛이 在摩竭提國阿蘭若法菩提場中하사 始成正覺하시니라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 때에 부처님께서 마갈제국(摩竭提國) 아란야법(阿蘭若法)보리도량(菩提道場)에 계시사 비로소 정각을 이루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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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아문(如是我聞); ‘이와같은 사실들을 제가 들었습니다.’
모든 경전은 여시아문으로 시작한다. 경전의 결집이 언제 이루어졌는가와 상관이 없다. 경전을 설한 주체는 언제나 부처님과 보살이고 듣고 재편집하는 사람은 아난존자이다.
오늘 경전을 새로 결집해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을 두고 역사적 사실을 운운한다면 아직 유치원생의 차원이라고 봐야 한다. 불교의 차원은 그런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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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一時); 한 때, 언제든지 화엄경을 펼치는 이 순간이 일시이다.
불(佛)이 재(在) ;부처님이 계셨다
마갈제국(摩竭提國);‘불생가비라 성도마갈타 설법바라나 입멸구시라’ 사시공양할 때 늘 외우는 진언처럼 마갈제국은 흔히 마갈타국이라고 한다. 부처님이 성도하신 부다가야이다.
아란야법(阿蘭若法);고요한 법, 적정법.
현상 이전에 본체의 입장이 아란야, 적정이다.
보리도장(菩提場中); 깨달음의 장소
시성정각(始成正覺); 비로소 정각을 이루셨다. 성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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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을 통해서 비로소 불교가 있게 되었다. 우리는 초파일행사보다 성도재일 행사를 몇 배는 더 크게 해서 부처님의 깨달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방편으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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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맨처음 삼칠일 동안 깨달음의 법열속에 계셨다. 그 때 부처님의 정신세계를 그린 경전이 화엄경이다. 다른 경전 중에 ‘시성정각’에서부터 시작하는 경전이 없다. 화엄경만이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셨다’고 하는 시성정각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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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셨을 때 이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어떻게 느껴질까.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그 깨달음의 눈으로 묘사한 이 세상은 모두가 장엄이다. 땅도 보리수도 궁전도 장엄되었다. 사실은 궁전이 없었음에도 깨달음의 시각에서 보니 어마어마한 궁전이다. 사자좌다. 지금 인도의 부다가야에 가봐도 알겠지만, 차디찬 바위에 보리수가 기대어 있을 뿐이다.
부처님은 그 나무 아래 길상초라는 풀을 깔고 앉아계셨을 뿐이다. 우리의 안목으로 보면은 그와 같이 평범하고 여린 바위나 풀에 불과하지만 깨달음의 시각에서 볼 때 이 세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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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처럼 우리는 각각의 소견과 수준과 감량과 지금의 기분만치만 세상을 본다. 이 법회를 이해하고 느끼는 것도 지금 각자의 기분만큼만 이해한다.
오늘 예를 들어서 아주 큰 복권이 한 장 당첨됐다면 세상이 전혀 달라보일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큰 깨달음을 성취하신 부처님의 눈에 이 땅은 어떻게 비춰지겠는가.
[경문]
二, 莊嚴
1, 地의 莊嚴
其地가 堅固하야 金剛所成이어든 上妙寶輪과 及衆寶華와 淸淨摩尼로 以爲嚴飾하고 諸色相海가 無邊顯現하며 摩尼爲幢하야 常放光明하고 恒出妙音하며 衆寶羅網과 妙香華纓이 周帀垂布하며 摩尼寶王이 變現自在하며 雨無盡寶와 及衆妙華하야 分散於地하니라 寶樹가 行列하야 枝葉光茂어든 佛神力故로 令此道場一切莊嚴으로 於中影現하니라
그 땅은 견고하여 금강(金剛)으로 되어 있었으며 가장 미묘한 보배바퀴와 온갖 보배꽃과 청정한 마니(摩尼)로써 깃대가 되어 항상 광명을 놓고 항상 미묘한 소리를 내며, 온갖 보배그물과 미묘한 향기나는 꽃다발들이 두루 드리워져 있었다.
그 마니보배는 변화가 자재하여 한량없는 보배와 온갖 미묘한 꽃들을 그 땅에 흩는다. 보배나무는 줄을 서 있고 무성한 가지와 잎은 빛나고 있었다. 이 땅의 모든 장엄은 부처님 신력(神力)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며 이 도량의 모든 장엄이 온 대지에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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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마디가 기지(其地)가 견고(堅固)하야 금강소성(金剛所成)이라고 하였다. 그 땅은 견고해서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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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짜 다이아몬드가 거기 널려있는가 하고 부다가야에 가서 곳곳을 쫓아다니면서 훑어보았다. 경에는 다이아몬드소생이라고 했지만 하나도 안보였다. 다이아몬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천지가 다이아몬드다. 그런데 나는 중생의 안목으로 보니까 부다가야 탑 주변이나 주변의 강가를 아무 가봐야 바위이고, 척박한 땅이고 모래자갈 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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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눈으로 볼 때 땅은 금강소성이라고 했다.
다음은 그에 대한 부연설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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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묘보륜(上妙寶輪); 상(上)은 최고라는 뜻이다. 최고로 아름다운 보배바퀴다.
급중보화(及衆寶華); 여러가지 보배로 된 꽃
청정마니(淸淨摩尼) 아주 훌륭한 마니, 마니도 값나가는 보물의 일종이다. 그것으로써 땅의 구석구석이 꾸며져 있다.
이위엄식(以爲嚴飾); 잘 장엄되어 꾸며져 있다.
제색상해(諸色相海); 여러 가지 모든 눈에 비친 사물과 보석들이 드넓은 바다처럼 펼쳐져 있는 낱낱의 색상들
무변현현(無邊顯現);끝없이 춤추듯이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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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간 맹인으로 산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세상사를 다 들어서 잘 알고 있었고, 아주 총명하였다. 그 정신세계와 영혼이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35년만에 눈을 뜨고 세상을 보았을 때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얼마나 감동적으로 다가왔겠는가. 상상해 보라. 35년간 맹인이었던 아주 총명한 청년이 비로소 눈을 떴을 때 세상 하나하나가 얼마나 아름답게 비춰졌겠는가. 그러한 것을 우리가 상상하면서 부처님의 깨달음의 입장에서 그려놓은 이러한 땅의 장엄을 이해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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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위당(摩尼爲幢); 마니라고 하는 값나가는 보배로써 깃대가 되어 있다.
상방광명(常放光明);(깃대는) 항상 큰빛을 발하고 있다.
항출묘음(恒出妙音);(깃대는)항상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중보라망(衆寶羅網);여러 가지 보물로 된 그물들
묘향화영 (妙香華纓);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아름다운 꽃들
주잡수포(周帀垂布); (꽃들이) 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 저기 곳곳에 펼쳐져 있다.
마니보왕(摩尼寶王) 변현자재(變現自在); 마니로 된 수많은 보물 중에서도 제일가는 보배가 있는데 그것은 온갖 변화를 자유자재로 나타낸다. 변현자재라는 것은 그냥 가만히 죽은 듯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온갖 변화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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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라는 말, 보배 보자가 벌써 셀 수 없이 많이 나왔다. 다이아몬드에서부터 상묘보륜 보화 청청마니 마니위당 중보라망 묘향화영 마니보왕 이렇게 이 세상에 있는 가장 값지고 아름답고 귀한 것들을 총망라 해서 다 이끌어 놨다. 이보다 더 좋은 보물이 있다면 그것을 갖다가 표현했을 것이다. 깨달음의 눈으로 세상을 볼 때는 그와 같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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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무진보(雨無盡寶); 다할 수 없는 보배가 비 쏟아지듯 쏟아진다. 화엄경에 우(雨)자가 자주 나온다. 내리지 않는 비는 없기 때문에 이 글자는 항상 비내린다고 해석한다.
급중묘화(及衆妙華); 여러가지 꽃들을 비내려서
분산어지(分散於地);온 천지에 흩고 있다.
땅도 이미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졌고 온갖 아름다운 마니보배로 이루어져 있는데 거기에다가 또 온갖 무진장의 보물과 아름다운 꽃들로서 온 천지에다가 흩고 있다.
보수항열(寶樹行列); 보배로 된 나무가 죽죽 줄을 지어서 늘어서 있다. 항열이라고 읽는다.
지엽광무(枝葉光茂); (그 보배나무는) 튼실하게 잘 자라서 가지와 잎은 빛을 발하고 무성하다
불신력고(佛神力故);부처님의 신력 때문에
영차도량일체장엄(令此道場一切莊嚴);이 도량의 일체장엄으로 하여금
어중영현(於中影現); 그 가운데 그 도량장엄이 다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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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보배나무가 하나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가로수처럼 쭉쭉 서있는데 온갖 도량의 아름다운 장엄이 그 나무에 이중삼중으로 비친다. 나무만 보아도 온 도량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림자로 다 볼 수 있다. 요즘 발달된 3D기술이나 홀로그램같은 것으로써 이러한 모습을 얼마든지 재현할 수가 있고, 그렇게 표현하면 근사할 것이다.
2700년 전에 이미, 오늘날 우리가 발달된 기술로서 표현하는 내용들이 다 설명되어 있다. 앞으로 이러한 내용이 무수히 나오는데 현대 물리학을 깊이 공부하는 사람들이 화엄경이라든지 불교 이론을 보면 감동을 한다. 도대체 그분의 정신은 어느 정도의 차원이기에 이미 이천 육백년, 이천 칠백년 전에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었는가 탄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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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것은 단순하게 소설가가 상상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지혜가 명철해서 이 존재의 실상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본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봐도 저 사람이 나에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캄캄하고, 눈 앞의 식물만 보아도 이 식물은 어떻게 자라는가 캄캄하다. 그런데 깨달은 사람의 입장이 되면 바로 식물이 되어 버리고, 바로 그 사람이 되어 버린다.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그사람이 되고, 생각하자마자 비가 되고 구름이 되고 물이 되고 나무가 되고 돌이 된다.
순식간에 백 퍼센트 그렇게 된다.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서 알아버릴 수 있으니까 2700년 전 이러한 내용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경문]
2, 菩提樹의 莊嚴
其菩提樹가 高顯殊特하야 金剛爲身하며 瑠璃爲幹하며 衆雜妙寶로 以爲枝條하며 寶葉扶疏하야 垂陰如雲하며 寶華雜色으로 分枝布影하며 復以摩尼로 而爲其果하야 含暉發焰하야 與華間列하며 其樹周圓에 咸放光明하며 於光明中에 雨摩尼寶하며 摩尼寶內에 有諸菩薩호대 其衆如雲하야 俱時出現하며 又以如來威神力故로 其菩提樹가 恒出妙音하야 說種種法호대 無有盡極하니라
그 보리수는 높고 훌륭해서 금강으로 몸뚱이가 되었고 유리로써 줄기가 되었으며, 온갖 미묘한 보배들로 가지가 되어 있다. 또한 잎은 무성하여 드리운 것이 마치 구름과 같고 보배꽃의 갖가지 색깔들은 가지마다 그림자를 드리웠다. 또 마니로써 그 열매가 되어 안으로도 빛나고 밖으로도 빛나며 꽃들 사이사이마다 빛나고 있었다.
보리수 주위에서는 모두 광명을 놓고 그 광명속에서는 마니보배를 쏟아 붓는데 마니보배 속에 여러 보살들이 있어서 그 수가 구름과 같이 동시에 출현했다. 또 여래의 위신력으로 그 보리수에서 항상 미묘한 음성이 흘러나와 갖가지 법문을 연설하여 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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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태자의 몸으로 출가하셔서 6년 고행 끝에 보리수 밑에서 비로소 정각을 이루시면서 불교는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 화엄경을 통해 그 연원을 짚어보는 이 시간, 우리는 불교세계의 일원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한다.
부처님께서 터득하신 깨달음의 내용이 과연 무엇인가, 우리들 중생으로서는 영원한 과제이고 세세생생의 숙제이다. 다행히 이와 같이 깨달음의 세계를 낱낱이 잘 그려놓은 소중한 경전이 있어서 그 세계를 문틈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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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수의 장엄
고현수특(高顯殊特); (보리수가) 높고 뛰어나다. 잎도 기름지고 빛난다.
금강위신(金剛爲身);다이아몬드로 몸뚱이가 되었다.
유리위간(瑠璃爲幹);유리로써 줄기가 되었다. 지금은 흔한 유리이지만, 옛날에는 인조유리이든 자연유리이든 유리는 보물중의 보물이다.
중잡묘보(衆雜妙寶) 이위지조(以爲枝條);아름다운 보배로써 가지가 되었다. 큰가지 지(枝), 작은 가지 조(條), 큰 가지 작은 가지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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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몸뚱이와 굵은 가지 작은 가지가 나왔으므로 다음으로는 잎이 나온다.
보엽부소(寶葉扶疏);보배로 된 나뭇잎이 무성하다. 부소(扶疏)라고 하는 것은 각자 잎 하나하나가 하늘거리는 모습이다. 나뭇잎들은 무성하면서도 서로서로 돕고 소통한다.
수음여운(垂陰如雲);(보리수가) 그늘을 드리운 것이 구름과 같다. 인도에서 우기가 되면 평원에서부터 구름이 몰려온다. 이 구름은 우리나라 같은 데서는 상상도 못할 두껍고 무거운 구름이다.
보화잡색(寶華雜色); 보배 꽃의 여러가지 색깔로서
분지포영(分枝布影); 가지를 나누고 그림자를 드리우고
부이마니(復以摩尼); 다시 마니로써
이위기과(而爲其果); 열매가 되어 있고
함휘발염(含暉發焰); (열매는) 빛을 머금고 있어서 반짝반짝 빛난다.
여화간열(與華間列); 꽃과 열매 사이사이 배열이 잘 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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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것을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근접해서 이해할 수 있을까. 단순하게 보리수를 묘사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 구절 한 구절은 부처님의 깨달음의 법을 상징한다.
하나하나 그 상징을 해석하기로 하면 끝이 없다.
일단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이 너무나 높고 깊고 풍부하기 때문에 그것을 보리수에 빗대어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보리수 뿐만 아니라 땅이나 궁전, 사자좌의 장엄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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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수주원(其樹周圓); 그 나무 둘레에
함방광명(咸放光明); 빛이 비추는 것이다.
우마니보(雨摩尼寶); (그 광명 가운데)마니보배가 비내리듯 쏟아진다.
마니보내(摩尼寶內) 유제보살(有諸菩薩);(비내리듯 쏟아지는) 마니보배 안에는 여러 보살들이 있다.
기중여운(其衆如雲); 광명속에 보살이 구름처럼 많다.
구시출현(俱時出現); 동시에 출현한다. 구름 속의 보살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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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마음속에 있는 깨달음의 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것은 비단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것이 다 갖추어져 있다. 그런데 기회를 얻지 못해서 표현이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깊이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러 가지 장엄들을 독송하고 읊조리면서 ‘우리 마음의 풍요로움을 이렇게 표현했구나. 우리도 다 갖추고 있지만 기회를 얻지 못해서 표현되지 못하고 있다.’라고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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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여래위신력고(又以如來威神力故); 부처님의 위신력 때문에
기보리수(其菩提樹); 그 보리수가
항출묘음(恒出妙音); 나무에는 으레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면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설종종법(說種種法); 가지가지 진리의 가르침 법을 설하는데
무유진극(無有盡極); 끊임없이 그 법을 설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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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수 장엄에 대한 묘사를 멋지게 했다.
소동파의 오도송이 생각나는 구절이다. 소동파는 상총선사에게 ‘왜 사람이 설하는 법만 자꾸 와서 들으려느냐, 무정설법 소리를 들을 줄 알아라’ 하는 말을 들었다. 천하의 소동파도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그래서 화두가 되었다. 내내 그것만을 생각하다 큰 폭포가 떨어지는 개울을 만나서 문득 폭포가 들려주는 무정설법을 들었다.
그 때 읊은 시가 소동파의 오도송이다.
계성변시광장설(溪聲便是廣長舌)
산색기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
야래팔만사천게(夜來八萬四千偈)
타일여하거사인(他日如何擧似人)
시냇물 소리, 폭포소리가 어찌 부처님 무진장의 설법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폭포를 토해내는 저 청산은 저절로 비로자나 부처님이다. 비로자나 부처님이니까 폭포를 통해서 무진설법을 토해내는 것이다. 하루종일 폭포수가 떨어지면서 굉음을 내는데 하루동안 설한 것이 팔만사천게송이다.
그 도리를 누구에게 이해시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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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도 깨닫고 나자 당신이 깨달음을 얻었던 보리수가 항상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데 설종종법(說種種法)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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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보리수의 장엄이다. 언젠가 부다가야 부처님이 깨달으신 그 금강보좌 옆에 있는 보리수에 가서 이러한 종종법 미묘설법을 우리가 들어야 할 줄 안다.
[경문]
3, 宮殿의 莊嚴
如來所處宮殿樓閣이 廣博嚴麗하야 充徧十方이어든 衆色摩尼之所集成이라 種種寶華로 以爲莊嚴하며 諸莊嚴具가 流光如雲하야 從宮殿間으로 箤影成幢하며無邊菩薩과 道場衆會가 咸集其所하야 以能出現諸佛光明하며 不思議音摩尼寶王으로 而爲其網하며 如來自在神通之力으로 所有境界가 皆從中出하며 一切衆生의 居處屋宅이 皆於此中에 現其影像하며 又以諸佛神力所加로 一念之間에 悉包法界하니라
여래께서 머무시어 거처하시는 궁전과 누각은 넓고 장엄하고 화려해서 시방에 충만하여 가지각색의 마니로써 이루어져 있었다. 그 궁전과 누각은 온갖 보배꽃으로 장엄하였고 모든 장엄에서는 광명이 흘러나와 구름 같으며 궁전 사이에서는 그림자가 모여서 깃대가 되었다. 또한 한량없는 보살들과 도량에 모인 대중들은 모두 그곳에 모여 여러 부처님의 광명과 부사의한 소리를 내었다. 또 마니보배로써 그물이 되었는데 여래의 자재하신 신통력으로 모든 경계가 다 그 속에서 나오고 일체중생이 거처하는 집들도 다 그 속에서 영상처럼 나타나며 모든 부처님의 신력으로 일념(一念)사이에 온 법계(法界)를 다 둘러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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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의 장엄이다. 사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 중생의 안목으로 보면 궁전도 없고, 누각도 없고, 깔고 앉은 풀도 이미 말라서 비틀어졌고 딱딱한 바위가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인데 부처님은 깨닫고 나자 그대로가 궁전누각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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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박엄려(廣博嚴麗); 넓고 넓으며 아름답고 화려하게 장엄이 잘 되었더라.
충변시방(充徧十方); 온 시방에 꽉 찼다.
세상 전체가 바로 내가 사는 궁전이요 내가 사는 누각이다.
따로 내 집이고, 내 절, 내 방이고 그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미 나와 세상은 한 몸이다.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하늘과 땅은 나로 더불어 한 몸이기 때문에 충변시방이라고 하였다.
중색마니지소집성(衆色摩尼之所集成);그 궁전 누각은 온갖 아름다운 마니보배로써 만들어져 있다.
종종보화(種種寶華) 이위장엄(以爲莊嚴); 온갖 아름다운 보배 꽃으로 장엄을 했으며
제장엄구(諸莊嚴具)유광여운(流光如雲); 여러 가지 장엄구들이 구름처럼 빛을 쏟아내고 있다.
종궁전간(從宮殿間)취영성당(箤影成幢);궁전 사이로부터 그림자를 모아서 깃대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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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궁전 사이에서 나오는 그림자를 모아서 하나의 깃대를 이루었다는 것은 요즘 기술로 치면 홀로그램 기술이고 3D기술이다. 내가 처음 홀로그램을 보았을 때 분명히 눈 앞에서 내가 걸어가고 있고, 손을 움직이고 있는데 만져보려니 만져지지가 않았다. 사실같이 눈앞에 보여지는데 만져지지가 않는 그것이 그대로 취영성당이다.
경전에서 이미 말해진 것들이 요즘의 기술로써 재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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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변보살(無邊菩薩)도량중회(道場衆會); 끝없는 보살들과 도량 도량의 온갖 대중들의 법회
함집기소(咸集其所); 바로 그 깃발 그림자 속에서 법회가 이루어지고 끝없는 보살들이 그 속에 노닐더라.
앞으로 많이 나오겠지만 바로 이러한 것이 사물과 사물이 걸림 없는 도리, 사사무애(事事無碍)다.
화엄경의 교리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사사무애의 도리다. 이것을 은연중에 여기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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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출현(以能出現) 제불광명(諸佛光明); 능히 제불의 광명과
부사의음(不思議音); 불가사의한 소리를 거기서 내며
마니보왕(摩尼寶王)이위기망(而爲其網);마니보배로써 그물을 만든다. 마니뒤에 왕(王)자가 붙었다. 으뜸, 최고라는 뜻이다. 뒤에 해(海)자가 붙으면 많다는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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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대목에서 경전이 결집될 당시 사람들이 선호하던 도구나 재료들이 나온다. 옛날에는 아름다운 궁전이나 호화로운 집의 장식으로 옥이나 광석으로 그물을 짜서 드리우는 장식이 흔했다. 그러한 모습들이 경전에 반영이 되었다.
여래자재신통지력(如來自在神通之力); 여래의 신통의 힘으로써
소유경계(所有境界); 있는 바의 경계가
개종중출(皆從中出); (그 그물 속에서) 막 쏟아진다.
일체중생(一切衆生) 거처옥택(居處屋宅) 일체중생이 거처하고 있는 바 그 집들이
개어차중(皆於此中) 현기영상(現其影像); 그 그물에서 전부 영상으로써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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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영상과 실재를 달리본다. 영상은 영상이고 실재하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좀 더 깨어있는 눈으로 보면 영상과 실재가 둘이 아니다.
깨어있는 눈으로는 실재를 영상으로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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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제불신통소가(又以諸佛神力所加); 부처님의 신력이 가피하는 바로써
일념지간(一念之間) 실포법계(悉包法界); 일념사이에 그물이 온 법계를 다 뒤덮었다.
뒤덮인 그물에 중생들이 사는 것도 영상으로 다 나타나고 온갖 것이 그 속에 다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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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궁전의 장엄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깨달음의 내용에는 이처럼 불가사의한 덕이 그 마음속에 포함되어 있다. 정직하게 말하면 사람사람에게도 그 불가사의한 덕이 다 내포되어 있다.
우리는 기회를 만나지 못해서 밖으로 표현하지 못할 뿐이다. 언제 어느 때인가 기회가 되면 우리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그 풍요로움과 덕이 이와같이 다 표현 될 수 있다.
[경문]
4, 獅子座의 莊嚴
其師子座가 高廣妙好어든 摩尼爲臺하며 蓮華爲網하며 淸淨妙寶로 以爲其輪하며 衆色雜華로 而作瓔珞하며 堂榭樓閣과 階砌戶牖의 凡諸物像이 備體莊嚴하며 寶樹枝果가 周廻間列하며 摩尼光雲이 互相照耀하며 十方諸佛이 化現珠王에 一切菩薩의 髻中妙寶가 悉放光明하야 而來瑩燭하며 復以諸佛威神所持로 演說如來廣大境界하시니 妙音이 遐暢하야 無處不及이러라
그 사자좌는 높고 넓으며 미묘하고 훌륭해서 마니로 좌대가 되고 연꽃으로 그물이 되었으며, 청정하고 미묘한 보배로 바퀴가 되어 있었다. 온갖 색깔의 꽃들로 꽃타래가 되고 전당과 누각과 섬돌과 창문 등 모든 불상들이 잘 장엄되어 있었다. 보배 나무의 가지와 열매들은 그 주위에 늘어서 있고 마니광명은 서로서로 밝게 비쳤다.
시방제불이 나타내는 구슬과 일체 보살들의 머리에 있는 미묘한 보배에서도 모두 광명을 놓아 찬란하게 비추었다. 또한 모든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여래의 광대한 경계를 연설하니 미묘한 음성이 멀리 퍼져서 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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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좌의 장엄이다.
현실적으로 생각한다면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앉아계실 때에 무슨 사자좌가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깨달음의 시각으로 볼 때는 우리가 처해 있는 그 자리가 비록 딱딱한 돌이고 척박한 자갈 모래 위라 하더라도 그 하나하나가 이렇게 소중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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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라서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모래와 자갈 그대로가 사실은 다이아몬드처럼 소중한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은 그와 같다는 안목이다.
인생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의 눈에는 이 세상 그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그렇게 값지고 소중한 것으로 비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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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좌(師子座)가 고광묘호(高廣妙好); 높고 넓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마니위대(摩尼爲臺); 마니구슬로 받침대가 됐고
연화위망(蓮華爲網); 연화로써 그물이 됐다.
청정묘보(淸淨妙寶); 훌륭하고 아름다운 보배로써
이위기륜(以爲其輪); 돌아가면서 그 둘레를 만들었고
중색잡화(衆色雜華); 온갖 색깔 여러 가지 꽃으로써
이작영락(而作瓔珞);꽃타래를 만들었더라
당사누각(堂榭樓閣);사당집 사(榭)자를 써서 당사는 정자이다. 정자같은 누각과
계체호유(階砌戶牖);섬돌이나 창문이
범제물상(凡諸物像);모든 물상이
비체장엄(備體莊嚴);통째로 다 장엄이 되더라. 비체(備體)는 통째로라는 뜻이다.
보수지과(寶樹枝果);보배나무에 가지와 열매들이
주회간열(周廻間列);두루두루 돌아가면서 가지마다 열매있고 열매마다 가지가 있다. 사이사이에 조화롭게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마니광운(摩尼光雲);마니로 된 빛이
호상조요(互相照耀);서로서로 비치고 비치며
시방제불(十方諸佛) 화현주옥(化現珠王); 모든 부처님이 나타낸 구슬
일체보살(一切菩薩) 계중묘보(髻中妙寶); 보살들이 계중에서 묘보가
실방광명(悉放光明; 다 광명을 놓고 있다.
이래영촉(而來瑩燭);(전부 광명을 놓는데) 환하게 촛불로 비추는 것처럼 비춘다.
부이제불위신소지(復以諸佛威神所持); 모든 부처님의 위신력을 가진 자로서
연설여래광대경계(演說如來廣大境界);여래의 광대한 경계를 연설하시니
묘음하창(妙音遐暢);아름다운 소리가 멀리 까지 들리고
무처불급(無處不及); 어느 곳이든지 미치지 아니한 데가 없더라.
우리는 아무리 좋은 마이크를 써도 기껏해야 백 미터 이백 미터 밖에 안 들린다. 그런데 부처님의 음성은 그런 기구를 안 써도 멀리까지 다 들린다. 이것 역시 존재의 일체성을 표현한 것이다. 하나이기 때문에 멀고 가까운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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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자좌의 장엄을 표현했다. 이 또한 부처님이 내재되어 있는 덕을 깨닫고나자 그것이 전부 밖으로 표현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덕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표현이 안 되었다. 이런 식으로 늘 우리자신과 연관시켜서 생각해 봐야 한다. 책은 책이고 나는 나라는 생각을 하면 안된다.
턱걸이 하듯 간신히라도 경전에 있는 가르침이 나의 삶, 나의 현실로 가까이 접근 되어야 한다. 그런 해석과 이해가 꼭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