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유보학 언수(劉寶學 彦修)에게 보낸 답장 1-18
유보학 언수(劉寶學 彦修)에게 보낸 답장 1-18
故로 經에 云不應住色生心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라하시니 謂此廣大寂滅妙心은 不可以色見聲求라 應無所住는 謂此心이 無實體也요 而生其心은 謂此心이 非離眞而立處라 立處卽眞也니라 孔子稱易之爲道也屢遷은 非謂此也라 屢者는 荐也요 遷者는 革也라 吉凶悔悋이 生乎動하나니 屢遷之旨는 返常合道也어늘 如何與應無所住而生其心으로 合得成一塊리요 彦冲이 非但不識佛意라 亦不識孔子意로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응당히 사물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소리와 향기와 맛과 감촉과 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광대하고 적멸하며 미묘한 마음은 사물로써 구하지 못하며 소리로써 구하지 못합니다. “응당히 머무는 바가 없음”은 이 마음이 실체가 없음입니다. “그 마음을 냄”은 이 마음이 참 마음을 떠나지 않고 나타남이며, 나타남이 곧 참 마음입니다. 공자가 말한 역(易)이 도가 된다고 한 누천(屢遷)은 이것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누(屢)는 “거듭하다[荐].”라는 뜻이요, 천(遷)은 “바꾸다[革].”라는 뜻입니다. 길흉회린(吉凶悔悋)이 움직이는 데서 생깁니다. 누천의 뜻은 항상함에 돌이켜서 도리에 합하는 것인데 어떻게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는 것”과 합하여 한 덩어리를 만들겠습니까? 언충은 다만 부처님의 뜻만 모를 뿐 아니라 또한 공자의 뜻도 알지 못합니다.
강설 : 역학에서 “거듭하여 자주 바꾼다[屢遷].”라는 말과 금강경의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라는 말은 얼른 듣고 깊이 사유하지 않으면 같은 뜻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혜 선사의 지적은 전혀 다르다. 이를테면 마음은 실체가 없다. 마음은 실체가 없으면서 그 실체가 없는 참 마음을 떠나지 않고 또한 마음의 온갖 작용을 나타낸다. 이것이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다. 주역의 이론과는 전혀 다르다. 대혜 선사는 언충을 향하여 주역도 모르고 불교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길흉회린(吉凶悔悋)운운은 주역계사전의 글이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