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수행과 잘못된 수행
올바른 수행과 잘못된 수행
정견·정안 갖추고,
동요하지 않는 것이 불교수행의 핵심
수행이란
심신(心身)의 수련을 통하여
마음의 평온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관련된 것이라면
다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수행,
선수행이라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불법(佛法)과
선(禪)의
정신에 맞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이른바 그 쪽에서 말하는 수행은 되어도
불교나 선에서 말하는 수행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가
냉정하게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수행을
점검해 봐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엉뚱한 것을 가지고
불교수행,
혹은 선수행이라고 오판,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불교계에는
위빠사나를 비롯한 여러 가지
다양한
수행도량이 속속 문을 열고 있다.
화두 참구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간화선,
호흡 조절을 통한 수식관,
원상(圓相) 등을 보는
관법(觀法),
마음의 움직임이나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위빠사나 수행,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부르는
염불선 수행,
경전을 독송·탐구하는
간경 수행,
기도와 참회를 통해
자신을 정화해 가는 참회 수행,
진언을 외우는 주력(呪力) 수행,
그리고
그 밖에는
인도의 요가와
도교의 기공(氣功),
단전호흡 등도 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불교수행은
그 목적이
탐욕(貪)과
분노(嗔),
어리석음(痴)
등을 제거하여
마음·정신을 깨끗하게 하는 데 있다.
육체적·정신적
수련을
통하여
번뇌 망상 등
마음에 낀 이물질을 정화하여
붓다와 같은
전인적(全人的)인
인격체를
만들어 가는 데 있다.
반야지혜로 일체 현상은
무자성(無自性),
공(空)임을
인식함과 동시에,
중도·무집착을
실천하여
번뇌로부터 해탈한
자유인이
되자는 데 있다.
그런데 의외로
불교수행의 정의를
확실하게 모르거나
유사 수행법과 혼동하는
이가 적지 않다.
예컨대 기공이나 단전호흡,
신체 단련 등 육체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 등은
도교의 수행은 되어도
참선수행이나
불교수행은 아니다.
또 요즘은 전생을 본다거나
혹은 타인의 운명을 훤히 꿰뚫어 본다고 하는
이들이 많은데 ,
심지어 이런 이들이 상주하는 카페도 있다!
이런 이들은 모두 혹세무민하는
사이비로 불교수행자는 아니다.
정신적인 신비함을 추구하는 것도
불교수행이 아니다.
요가수행도 좌법(坐法) 등 방법은 같지만
그 목적은 다르다.
그리고 진언이나 다라니 염송을 통한 수행도
무언가 정신적 영감을 얻기를 바란다면
이 역시 불교수행은 아니다.
또 요즘 일부에서는
고목처럼 오래 앉아 버티는 것을 가지고
수행의 척도로 삼는 경우도 있다.
몇 달 또는 몇 년 앉아 있었다고 해서
깨달은 척,
목에 힘을 주는데,
수행의 최대 관건은
‘몇 년 앉아서 참선했다’,
‘몇 년 선방에 있었다’
또는 ‘몇 년 수행처소에 있었다’는
경력이 아니다.
수행을 통하여
정견(正見)과
정안(正眼)을
갖추었느냐?,
탐진(貪嗔) 번뇌와 물욕,
분노 등에 마음이
동요되지 않느냐?
가 핵심이다.
수행에도 올바른 수행과 잘못된 수행,
건전한 수행과 불건전한 수행이 있다.
수행을 통하여
아만과 무지
·욕망
·분노
·증오
·어리석음 등을
제거하는 것은
올바른 수행이지만,
자존심을 강화하는 것,
또는 영적 체험이나 육체적
·정신적 신비를 추구하는 것 등은
모두 다 불건전한 수행이다.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 사이비 수행일 뿐,
불교와 선에서 말하는 수행은 아니다.
오늘날 수행은
무엇보다도
마음의 정화와 함께
인격적인 수행이
병행되어야 한다.
몇십 년 수행을 했다면서
분노나 욕망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
그것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인격 없는 수행은 무의미하다.
또 불교수행은
지혜를 갖추는
수행이어야 한다.
반야지혜를 갖추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불교수행법은 아니다.
-윤창화 민족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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