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수덕사 견성암에서의 안거 중에 일어난 일이다.
밤이면 선방에 놓여 있던 향로가 사라졌다.
당시 방사가 부족해서 선방 대중 스님 모두가
큰방(선방)에서 몇 십 명씩 함께 잠을 잤는데,
잠을 자고 일어나 보면 향로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선방 스님들이 향로를 찾으러 나가보면
선방 앞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대중들은 술렁거렸다.
"이게 무슨 일이냐?
신장님이 노하셨다 보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한 일이다."
의견이 분분한 끝에 내린 결론은
'향로를 나무에 묶어놓은 솜씨를 보면 분명 사람이 한 일이다.
그를 잡아라.'
선방 스님들은 조를 짜서 며칠 잠을 자지 않고
번갈아가며 지켜보기로 했다.
드디어 선방 스님들이 소등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잠시 후 큰절(수덕사)에서 젊은 스님 한 사람이
견성암으로 올라왔다.
뚜벅뚜벅 거침없이 올라와서는
선방문을 열고 향로를 들고 마당에 나가
향로를 엎어 재를 탁탁 털고는
나무에 매달아놓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산길을 내려가는데
걸음이 비호처럼 빨라서 따라갈 수가 없었다.
며칠 후 드디어 향로를 나무에 매달아놓은 스님이 잡혔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
어른 스님의 추상같은 꾸짖음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젊은 스님이 이렇게 대답했다.
"왜 공부를 하지 않고 잠을 잡니까?
허구한 날 자는 게 잠 아닙니까?"
출가한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스님의 일갈에
선방 스님들이 얼굴을 들지 못했음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화계사 조실이셨던 숭산 스님의 이십 대 때 일화다.
당시 견성암 선방에서 안거를 나면서
그 일을 목격했다는 한 스님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전해들었다는
광옥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광옥 스님은 삼십 대 초반에 캐나다로 가셔서
삼십 년 동안 그곳에 머물며 한국불교를 포교하는
예순이 넘어 돌아오신 비구니 스님이다.
"곁에서 뵌 숭산 큰스님은 정말 깊은 신심과 함께
신명을 다 바치고 사신 분이었어요.
제가 환갑 때, 숭산 큰스님에 대한 이 이야기를
문득 떠올리고 제 삶을 돌아보았어요.
너무 많이 자고 너무 많이 먹었더군요.
먹은 것은 남산만큼이고,
잠잔 시간을 따져보니 이십 년을 잤더라구요.
평생 쉬지 않고 공부해도 마음이 열리기 어려운데···· .
그날 이후 정식으로 요를 깔고 자지 않습니다."
1976년, 숭산 스님을 뵙고 나서 출가하게 된
뉴욕 조계사의 묘지 스님은
숭산 스님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스님께 너무 감사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 빚을 갚을 수 있을까요?"
좋은 선배와 스승을 만난 것으로 인해
평범한 삶에 종지부를 찍고
인생을 바꾼 스님이었기에
그런 질문이 가능했을 것이다.
남편과 자식이 있는 유복한 가정을 뒤로 하고
이민 온 미국 땅에서 출가를 결행한 묘지스님의
질문에 숭산 스님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복이 많아 글을 잘 쓴다.
너는 이 공부를 해내는 거다.
끝까지 해내는 거다.
그게 빚을 갚는 거다."
'끝까지 해내는 거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온 세상이 환해진 것 같은 느낌과 함께.
'내가 공부를 하면, 나로 인해 또 다른 세상이 열리고
또 다른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는
묘지 스님은 그로부터 삼십 년이 흐른 후,
어느 지면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무언가를 끝까지 해낸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끈기와 인내가 필요하다. 끝없이 자신과 싸우는 과정이다.
그 자리에서 사생결단을 낼 마음으로 들러붙어야 한다.
끝까지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나 그래도 해야 한다.
무조건 해야 한다.
절실하면 해야 한다. 다른 변명이 필요하지 않다."
세계 4대 생불(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캄보디아의 마하 고사난다.
베트남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틱낫한 그리고
한국의 숭산 스님)로 존경받았던 숭산 스님의
세계적인 저력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대단했던 것 같다.
숭산 스님은 폴란드, 구소련, 일본 등
전 세계를 누비며 불법을 전하다가 사십 대 중반,
혈혈단신으로 1972년도에 생면부지의 미국으로 건너갔다.
진정한 행복이 물질보다 정신적인 것에 있다는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미국 젊은이들을 보면서
'불교는 필요한 곳에 있어야 한다!' 는 게 그 이유였다.
몇 년간 세탁소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영어를 익혔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일이다.
삼십여 년 동안 한국불교를 포교하면서 현각, 무량,
무상 스님 등 수많은 외국인 제자들을 길러냈다.
"캐나다에 오래 계셨으니 미국에서 오랫동안
포교하신 숭산 스님도 잘 아시겠네요?"
눈가의 주름이 아름답고 웃음이 단정했던
광옥 스님은 숭산 스님에 대한 말씀을 이렇게 전했다.
"스님은 말할 수 없이 부지런하셨고 신심이 깊으셨어요.
원력 또한 대단하셨죠."
'부지런함'과 '신심'과 '원력'으로 숭산 스님을 설명하셨다.
"숭산 큰스님의 근면함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대단하셨어요.
큰스님깨서 미주, 캐나다, 유럽 등 세계 여러 나라에
있는 선원을 순회하실 때 곁에서 모신 적이 많았죠.
큰스님께선 그 전날 아무리 늦게 주무셔도 늘 새벽 한 시면 일어나셨어요.
그러고는 구백배를 하시는 게 하루 일과의 첫 시작이었죠."
천팔십배가 아니고 왜 구백배였을까.
"평생 하루 천팔십배를 하셨는데, 나머지 백팔배는 새벽예불 때 대중들과 함께 하셨죠.
아마 평생 한 번도 거르신 적이 없을 거예요.
오래전 중국과 우리나라가 수교가 안 되었을 때,
종교인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한 적이 있으셨어요.
기차만 며칠을 타고 가는 중에도 스님께선 매일
새벽에 일어나셔서 열차 통로에 담요를 깔아놓고
천팔십배를 하셨다고 합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문병을 간 자리에서
광옥 스님이 숭산 스님께 여쭈었다고 한다.
"스님! 요즘에도 천팔십배 하십니까?"
"신심과 원력이 원대하지 않으면 그럴 수가 없지요.
스님은 일 년 삼백육십오 일 용맹정진을 하신 분이에요.
거의 한 해 동안 세계 각지의 제자들이 이끌고 있는
선원들을 순회하셨는데,
각 선원에선 일 년에 한두 차례 일주일씩 용맹정진을 하죠.
그때마다 큰스님께선 꼭 대중과 함께 정진하셨어요.
단 한 시간도 빠지지 않으셨죠.
그쪽 선원들은 일 년에 한두 차례지만
스님은 꼬박 일 년 내내 용맹정진을 하신 거죠.
곁에서 봐도 정말 그 신심이 놀라왔어요."
"용맹정진은 어떤 식으로 했나요?"
"한국에서와 똑같이 예불, 좌선(명상), 염불을 했어요.
예불문이나 염불도 항상 한국말로 했죠.
많은 외국인들이 모여 한국말로 '지심귀명례' 하고
예불을 시작하면 참 장관이었죠.
몇 시간씩 한 자리에 서서 '관세음보살' 정근을 하는데,
그땐 목탁, 북, 꽹꽈리 등 손에 들 수 있는 악기들이 등장했죠.
심지어 집에 있는 도마까지 들고 나와
그것들을 두드리면서 염불을 하는데,
얼마나 하모니가 아름답고 장엄한지 몰라요.
마치 염불음악회 같았죠.
큰스님께선 언제나 맨 앞에서 작은 북을 치시면서
아주 큰 소리로 염불을 하셨죠.
얼마나 염불소리가 좋은지 따라 하는 사람들이
전부 환희로워했어요."
일 년 내내 계속되는 용맹정진을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대중들과 함께하셨다니,
숭산 스님의 저력이 바로
그러한 수행에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숭산 스님의 성품이라든가 인간적인 면이 궁금했다.
"큰스님은 모든 신심을 다 바치신 분이었죠.
미국에 오셔서 크게 인간적인 배신을 당한 적이 있으셨어요.
포교를 위해 미국에 오셔서 고생하면서 이룬 모든 것을
한 사람으로 인해 잃어버리셨죠.
어렵게 다시 시작하셨는데, 당신을 배신하고
모든 것을 가져간 그 사람에게 여전히 무얼 주시는 거예요.
불러서, 때로는 방문해서 무언가를 주시곤 했죠.
저희들이 기가 막혀 '스님은 그러고 싶으세요?' 라고 여쭈었는데
이에 답한 큰스님의 대답이 너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job이고 내job은 그에게 주는 것,
그것뿐이라네' 라고 하셨죠."
"오직 모를 뿐.
"오직 모를 뿐.
숭산 스님께서 세상에 던진 저 깊고
절실한 화두가 어디에서 왔는지 비로소 실감되었다.
(인생을 낭비한 죄 (박원자 著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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