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강백무비스님강의·무불스님엮음금

[스크랩] 이상적멸(이상적멸)

娘生寶藏 2011. 4. 18. 15:00

이상적멸(離相寂滅)

 

                     상(相) 을 떠났음으로 해서 우리 마음이나 또 우리의 삶이 나 모두 적멸(寂滅)하다.

고요하다 하는 그런 뜻이다.

열반(涅般)을 번역할 때 적멸이라고 한다.

스님들이 열반에 들었을때 적멸에 들었다 한다.

이렇게도  표현하고 또 원적(圓寂)이라, 고요할 적(寂)자를 써서 아주 제대로 고요해졌다.

원만(圓滿)이라,고요할 적(寂)자를  써서 아주  제대로 고요해졌다,

원만(圓滿)하게 고요해졌다 하는  그런 표현을 쓴다.

적멸이라고 하는 말이나 원적이라고 하는 말이나 열반이라고 하는 그런 말은 모든 것이,

온갖 차별상(差別相)이 사라진 상태, 또 온갖 그런 말은  모든 것이, 온갖 차별상(差別相)이

 사라진 상태, 또 온갖 시비와 갈등이 다 사라진 상태를 이야기 한다.

 

상(相)을 떠나면 어째서 적멸(寂滅)이 되느냐,,?

상이라고 하는 것이 차별이다.

사실 우리가 함께 공부를 하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사람이 같고 같은 면들이 많이 있다.

그런 반면에 좀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낱낱이 다 다르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고  온갖 느낌이 다르다.

예를 들어서 오늘 날씨가 덥다 하면 덥다고 느끼는 것이 사람마다 다 다르다.

같을 수가 없다.

물론  한 마디로  덥다 하면 더운것이다.

똑같이 덥다 이렇게 할 수 있지만, 아주 미세하게 관찰하면 그 더운 걸 느끼는 것도

사람에 따라 다 다르다.

이것이 차별 상(相)이다.

 

여기서 상(相)을 떠나서 적멸(寂滅)하다고 하는 것은, 그런 바같으로 차별된 모습을 전부

 하나로 섞어서 똑같이 만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말하는 것이 아니고,차별한 모습 각각

 다른 모습을 그대로 두고 어떤 통일된,하나된 그런 세계에 눈을 뜨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학(鶴)의 다리가 길다고 그 다리를 잘라서 오리 다리에 이어서 학의 다리와 짧은

오리 다리의 길이를 똑같게 하는 그런 평등, 그러한 적멸(寂滅),그러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학(鶴)의 다리는 긴 대로, 오리 다리는 짧은 그대로 두고 차별된 그 모습 그대로 두고

우리가 평등(平等)을 보는 것이고, 그대로 어떤 동등하고 어떤 통일된 그런 이치를 우리가

보는 것이다...그러니까, 그런 차별을 두고, 거기서 평등을 봐야지. 다르게 생긴 것도전부

섞어서 똑같은 모습으로, 예를 들어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그렇게 만들어서 평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는 평등이라는 것을 잘 쓰고, 또 무차별(無差別),차별이 없는 세상,평등한 세상을

잘 말하는데, 그대로 둔 상태에서 알고 보면 그대로 차별된 모습 그대로가

사실 평등한 것이다.

그것을 하나의 모습으로 만든다고 해서 평등한 것이 아니다.

잘 몰라서이지 사실은 차별된 모습, 그대로 두고 평등한 것이다.

이런 이치를 우리가 깨달아야 하고 느껴야 하고 이해해야 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부처님의 어떤 차별상(差別相)을 떠난 어떤 평등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만, 부처님은 언제나 모든 존재의 어떤 모델로서 아니면  대표로서 이야기되고,

그것이 우리 중생들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공(公)히 적용된다고 하는 사실을 경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 사람들을 다 열거해서  보여줄 수는 없는 것이지만 부처님을 이야기함으로 해서,

바로 우리 모두가 그리고 세상에 펼쳐져 있는 모든 삼라만상이 부처님의 설명 그 속에 공히

용해(鎔解)되고 같이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줄거리에 중도(中道)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많이 열거한 장이 있었다.

앞의 단락에서 설(說)하신 '32상이 즉시비상(卽是非相)이고 그 이름이 32상이다'의 32상,

그것이 다 차별상이다.

나타나는 것이 상이라는 모습인데 그것은 어떤 상으로만 우리가 국한해서 본것이 아니다.

상(相)을 떠난 어떤 경지, 거기에서는 모두다 상이 있는 것은 그대로 두고 사실을 평등하게

보는 것, 그것이 말하자면 중도(中道)의 도리고,말하자면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

인욕바라밀이 아니고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이다.

중생이 중생이 아니라 그 이름이 중생이라,이것을 적용시키면 모든 사물에 적용이 된다.

예를 들어 남자가 남자가 아니다.

그 이름이 편의상 남자라는 이름을 붙여서 그런 것이고  여자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물에 대해서 우리가 그렇게 이해함으로 해서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중도(中道)적인

바른 소견을 가질수 있다.

치우치지 아니하게 되고, 치우치지 아니함으로 해서 어떤 고통과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금강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중생들의 고통과 아픔도 덜어주고자 하는,해결해주고자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경전이라는 것은 결국 어떤 경전을 막론하고 다 약방문이다.

중생들의 병을 치료하는 처방전이다.

중생들이 어디에서 고통을 앓고 있는가..?

모두가 차별상에서 고통을 앓고 있다.

차별상은 치우친 소견 때문에 차별되게 본다는 것에 있다.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는 사람만 꼭 힘드는 것이 아니다.

집에서 살림 사는 여자들은 남자가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남자는 또 여자가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그 나름의 특징을 가지고 있고 저마다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알고 보면 다 ;;

평등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담장을 쌓는데 대개 큰돌을 많이 쓰지만, 그러나 큰돌을  받칠때 작은

돌이 필요하다.

작은 돌을 찾다가 없으면 큰돌을 깨어서라도 작은 돌로 사용한다.

그러면 큰돌과 작은 돌의 가치가 어느것이 더 있겠는가..?

어느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우리가 말할 수는 없다.

작은 돌은 작은 돌대로 큰돌은 작은대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오리 다리가 짧으면 짧은 대로 학의 다리가 길면 긴대로,우리가 눈을 뜨고 있어도

 보지 못해서그렇지 정말 보다 다른 지혜의 눈을 뜨고 보면,이 세상에 생긴 대로 그대로가

하찮아 보일수도있지만 보다 넓은 안목으로 자세히 관찰해보면 하찮은 것이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다.

다 존귀하고 다 그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고 전부 그 나름의 자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거기에서 말하자면 차별상은 사라지는 것이다.

우열이 없는 것이고 고귀가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대부분 차별상을 보고, 또 그 차별 때문에 치우친 소견을 갖게 되고

중도(中道)적인 안목을 못 갖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이라든가 금강경을 부처님께서 우리 인간의 고통을 고치고 다스리는

최상의 처방전으로서 이 세상에 내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다가,이런 저런 인간 문제가 되었든 물질의 문제가 되었든 물질의 문제가 되었든

 어떤 문제가 되었든지 간에 문제가 일어났을 때, 우리들은 금강경의 가르침을 면밀히

살펴보고 거기서 지혜를 얻고, 금강경이 힘들면 잘 외우고 있는 반야심경에서도 얼마든지

 새롭게 볼 수 있는 ,바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지혜의 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무불스님
글쓴이 : 길상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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