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등불
우리가 어떤 이치에 어두우면,
바른 이치에 어두우면 그것이 어리석음이다. 어리석음은 태양 빛이 없고
불빛이 없고 등불 빛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빛이 없는 길을 가는 것은 캄캄한 길을 가는 것이 되는 것이다.
어두운 길을 내려갈 때는 그냥 넘어지고 상처입고 가는 그런 인생을
가는 것이 된다.
가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우리는 인생이란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는 지혜의 빛을 의지해서,
부처님의 지혜의 빛을 빌려서 살아가야 한다.
혼자 두면 엉망진창이 된다.
성인(聖人)의 지혜(智慧)를 빌려서 깨달으면 좋겠지만,
그리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니까, 부처님이 진리 등불을 밝혀 놓은 길을 따라
상처도 적게 받고 어리석게 살지 않아야 겠다는 것이다.
비유가 단순한 것 같지만 정말 기가 막힌 비유다.
밝으면 아무리 가파른 길이라도 재미있게 오르내리고, 또 어려운 코스일수록
볼만한 게 많고 그렇지만, 어두우면 어려운 코스가 오히려 상처를 주는
무기가 되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사가 어렵고 힘들수록 더욱 살만하다고 할 것이다.
등산을 가도 평탄한 길은 별로 재미가 없다.
가파르고 오르막 내리막 걸으면서 계곡물 바위산이 많을수록 경치가 볼만하다.
그리고 이것은 눈이 있기 때문에 볼만한 것이 된다.
인생사도 평탄한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지혜의 눈을 가진 사람에계는 평탄할 것은 평탄한 대로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다 살만한 것이다
부처님은 행복하고 평화롭게 잘 사는 사람들에게 하신 법문은 거의 없다.
잘 사는 사람에게는 하신 법문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힘들고 어렵게 살고 고통받고 어리석고 미련하고 상처투성이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주로 법문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불교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이 목적이다.
고통을 떠나서 편안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편안한 사람에게 더 행복하도록,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무엇으로 인해서 고통받는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해소하여 주어서 편안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어둡고 어리석은 마음에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지혜의 눈을 뜨도록 하자.
지혜라고 하는 것은 바른 이치를 아는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계시는 것이다.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소득이 있는 것인지 부처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 하신다.
커다란 창고에 금은 보화와 온갖 돌과 흙덩이,그리고 잡초가 잔뜩 뒤섞여
있는데,누구든지 들어가서 한껏 짊어지고 나오면 그것이 다 자기 것이 되었다.
그렇게 했을 경우 창고 속이 깜깜해서 아무 것도 볼 수 없다고 하면,
손에 더듬더듬 잡히는 대로 한짐 짊어지고 나왔을때. 불행하게도 돌덩이만
지고 나올 수도 있고 다행이 금은 보화를 짊어지고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그곳이 환히 밝은 곳이라면 누가 돌덩이를 짊어지고나오겠는가.
금은 보화 값진 것을 가지고 나올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지혜의 눈이 있는 사람은 인생을
사는데, 늘 평화롭고 행복하게 즐겁게 살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빛이 있는 사람과 빛이 없는 사람과의 차이, 눈 뜬사람과
눈이 어두운 사람과의 차이는 이렇게 엄청난 이익의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다.
제발 지혜의 눈을 떠라.
모든 것을 꿰뚫어 아는 지혜가 있는 사람,그것이 부처님이다.
부처님의 이름에서 불교의 본 정신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연등불(燃燈佛)이라고 할 때 연등불이 무엇이냐..?
지혜의 등불을 붙이는 부처님이다.
극락세계(極樂世界)를 주도하는 아미타불(阿微陀佛)은 무량광(無量光)이다.
한량없는 지혜의 말이다.
한량없는 지혜의 말이 우리 마음으로부터 넘쳐난다면,
우리는 그 순간 바로 극락세계에서 사는 것이다.
극락을 그대로 누리고 사는 것이다.
"법화경"에서 일월등명불(日月燈明佛)이라는 최초의 부처님 이름에서 나온다.
법화경에는 이만(二萬)부처님이 등장하는 대목이 있다고 했다.
전불(前佛) 후불(後佛)이 개통일로(開通一路)라,앞의 부처님이나 뒤의
부처님이나 모두가 한결같은 이름이다.
같은 이름이 뭔가..?
일월문명(日月문明).태양(日).달(月).등불(燈),전부가 지혜의 태양이며
지혜의 등불이며 지혜의 달이다.
우리는 등(燈)을 왜 켜는가..?
마음으로부터 지혜의 등불을 밝히자는 뜻에서 켜는 것이다
절에서 초파일에 등을 켜고 법당에 인등을 켜는 것, 모두가 밝은 빛 지혜의 눈을 뜨자는 데 그 본형이 있는 것이다.
눈 뜨면 그냥 그 자리가, 어떤 처지에 살든지 남이 뭐라고 평가하든지 간에,
내가 서 있는 그 자리가 그대로 금은보화로 넘쳐나고 행복과 평화로
넘쳐나는자리가 된다.
달리 딴 곳에 있지 않다.
부처님이 비로소 전각(殿閣)을 세우시니,땅은 견고해서
다이아몬드로 이루워졌더라.
그렇게 표현하였다.
"화엄경"에서 지혜의 눈을 뜨고 나니까,온세상이 전부 다 다이아몬드로
있더라는 것이다.
다이아는 그냥 흙투성이 자갈투성이 아주 천박한 땅에서 건져낸다.
그럼에도 그렇게 표현하였다.
지혜의 눈을 뜨고 보면 이 세상 그대로가 좋은 것,
부처님이 깔고 앉은 길상초(吉祥草)라는 것이다.
길상초라는 풀도 그냥 아무 곳이나 많이 있는 그런 풀이다.
그런데 그것도 기가 막힌 좋은 풀이라고 해서 길상초가 된 것이다.
그것을 또 금강보좌(金鋼寶座)라 했다.
풀 바짝 마른 것 깔고 앉아서 방석도 없었다.
부처님은 그 바짝 마른 풀,
몸이찔리는 그런 풀을 깔고 앉아서 금강보좌라그랬다.
다이아몬드로 만든 큰 보배로 된 그런 자리에 앉았다고 하는 그런 표현을 했다.
변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눈을 뜨고 보면 행복과 평화가 바로 앉은 그 자리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자기 처지에 있는 무엇이든지 아무 것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머리를 기르던지 짧게 자르든지, 혼자 살든지 둘이 살든지.
끼니가 있든지 없든지, 아무 조건도 필요치 않다.
불교가 좋은 점이 바로 이 점이다.
세속에서 바라는 바, 세속에서 지향하는 바 그것을 불교에서 이야기하면,
종교의 장점이 없어지는 그런 이치가 될 것이다.
여기 감명 깊게 읽은 대목이 있다.
'수보리야, 보살의 마음이 어떤 법칙이나 어떤 규칙에 머물러서 자비행,
보시행을 행한다고 할 경우,
어떤 사람이 캄캄한 곳에 들어가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만약 보살이 마음에 그런 법칙,어떤기준.어떤 규칙에 머물지 아니하고
보시를 행한다 할때, 상대야 절을 하든 말든,불사하는데 시주를 많이 하든
적게 하든, 별로 달갑게 여기는 것 같지 않아도 그냥 보시행을 한다.
상대가 위해주고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한다면,
그때부터 그는 고통의 연속이 되어 캄캄한 곳에 들어간 것이 된다.
오나가나 부닺치고 넘어져서 부러지고 하여 피투성이가 된다.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는다는 것은 큰 일이 되고 만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고해(苦海)라 했다.
고해의 바다속에 빠져있는 사람이 비닐 옷을 입었다고 물에 젖지 않을 수 없다.
그 고통의 물은 누구나 젖게 되어 있고,얼마나 젖든지 간에 다 고해의 고통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 상처를 받고 산다.
그리고 그것을 다 남의 탓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가 눈을 떴다고 하는 것은 사실 어마어마한 복이다.
눈이 없는 사람하고 비교해서 생각해 보면 정말 어마어마한 것이다.
글을 본다.
얼굴을 본다.
상대가 찡그렸는지 웃는지 다 본다.
세상이 눈에 다 들어 있다.
봄이면 봄의 모습,여름이면 여름의 풍경,가을이면 가을.
겨울이면 겨울을 다 본다.
얼마나 좋은가.
무량.무변공덕이 바로 뭐겠는가..?
그런데 정말 눈을 제대로 뜬사람이라면 이건 더 말할 수 가 없다.
참으로 무량.무변공덕을 성취한 사람일 것이다.
복이 많아 무량.무변공덕이니까. 눈 뜬사람,눈을 뜨려고 하는 사람이 무량,
무변의 공덕을 받는 사람이다.
무량.무변공덕을 성취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