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법염처경

[스크랩] Re:염처경-인경스님 강의

娘生寶藏 2011. 6. 29. 17:05

염처경(念處經)의 특강 1

 

1. 하나의 길

 

여기에 하나의 길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킨다.

이것은 우울과 한탄을 이겨내고, 깊은 슬픔과 불편한 느낌을 소멸시킨다.

이것은 진리의 길을 걷게 하고, 궁극의 해탈을 실현하게 한다.

이것은 바로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이다.

 

이것은 『대염처경(大念處經Mahasatipatthana Sutta)』에서 알아차림의 유용성을 설하는 부분이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이여'라고 부르자, 대중은 '세존이시여'라고 큰소리로 응답을 한다. 그러자 부처님은 '여기에 하나의 길이 있다'고 선언한다. 성경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대신에 초기불교는 '여기에 하나의 길이 있다'고 말한다.

어두운 숲길에서 햇살을 발견하는 것처럼, 길은 늘 지금 여기에 있다. 길은 지금 여기의 현재에서 걸어가야 한다. 이해가 아니라 '길'은 무엇보다도 실제로 걸어야 한다. 이것이 길이다. 이것은 실천되어야 한다. 손가락에 의해서 창공의 달은 가리킬 수는 있지만, 내 앞에 놓인 길은 걸음으로써 완성이 된다.

 

하나의 길(ekayana)에서 '하나(eka)'와 '길(ayana)'이 결합된 낱말로 한역으론 '一道'나 '一乘'으로 번역이 된다. 길이란 비유로서 이쪽 장소에서 저쪽 장소에 이르게 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킨다. 이쪽은 우울과 한탄이며, 슬픔과 불편함이며, 저쪽은 진리이고 궁극의 해탈이다.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이끄는 수레, 그 가르침이 바로 '알아차림(sati)의 확립'이다. 알아차림의 확립을 통해서, 우리의 고통은 정화가 된다.

 

그런데 왜 '하나'의 길(Ekayana)이라 하는가? 남방 상좌부의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알아차림의 확립은 두 갈래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며, 혼자서 걸어야할 길이기 때문이요, 열반에로 가는 하나의 길이기 때문이요, 그때 처음 한 사람으로서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유일한 길(the only path)'이라고도 번역하기도 한다. 이는 교설의 독자성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길을 배제하는 배타성이 내포된 해석이다.

 

북방의 대승불교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해석할까? 이것은 대승불교에서 쟁점이 된, 세 가지의 길이란 의미의 삼승(三乘)과 하나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일승(一乘)의 논쟁을 생각나게 한다. 삼승이란 세 가지의 가르침이란 의미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걷는 성문의 길,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다는 연기법을 관찰하는 연각의 길, 사회적인 실천을 중시하는 보살의 길이다. 이들은 세 가지 근기에 따른 고유한 가르침의 유형을 말한다.

 

반면에 하나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일승은 이 모두가 귀결되는 길을 말하기도 하고, 혹은 그것과는 별도의 궁극적인 '하나'를 의미하기도 한다. 초창기 화엄은 세 가지의 길과 하나의 길이 서로 다르지 않는 동질성을 강조했다. 이럴 때는 '동일한 가르침[同敎]'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신라의 의상과 동문인 법장의 『오교장』이후에는 화엄교학의 독자성을 강조할 목적으로 세 가지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하나의 길이란 의미에서 '별도의 가르침(別敎)'라는 용어를 더 자주 사용하였다. 이런 표현은 역시 다른 방식의 가르침, 길에 대해서 자신들의 교설이 가지는 우월성을 강조하는 배타적 성격을 반영한다.

 

유일한 길, 별도의 가르침, 그렇다면 선종은 어떨까? 그들도 마찬가지로 전해오는 '가르침 이외에 별도의 길(敎外別傳)'을 강조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면, 이 궁극의 하나는 어디로 귀결되는가? 그것은 뜰 앞의 잣나무다. 내 발밑에 분명하게 가로 놓인 가로수 길이며, 우울과 한탄을 잘라내는, 지금여기다. 하지만 그것은 길이 없는 길이기에, 정해진 하나의 길도 없는 까닭에, 모든 길로 통한다. 그래서 『무문관(無門關)』은 이렇게 말한다.

 

큰 길은 문이 없으니,

어떤 길도 모두 통한다.

이 관문을 뚫는다면,

하늘과 땅 사이를 활보하리라.

(大道無門 千差有路

透得此關 乾坤獨步)

이렇게 보면 여기서 하나의 길은 언어나 분별을 떠난, 그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가 없는, 영적인 수행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로서 유일함이란 배타적인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언어적이고 관념적이고 사회적인 규약을 벗어난, 또한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난 큰 길을 말한다. 이것은 별도의 문이 없는, 아주 큰 길이다. 이와 같은 길이, 여기에,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것은 다름 아닌 바로 알아차림의 길이다.

 

알아차림은 인간의 고유한 본성이다. 불의 본성은 태움이다. 태움이 없으면 불이라 할 수가 없다. 물의 본질은 젖음이다. 물건을 젖게 하는 것이 바로 물이다. 젖음이 없는 물은 물이 아니다. 그러면 인간의 마음은 무엇을 그 본질로 할까? 그것이 바로 알아차림이다. 알아차림은 없는 마음은 마음이 아니다. 마음의 본질은 바로 알아차림이다. 이 알아차림은 침묵이고, 깨어있음이고, 깨달음이며, 불성이다.

출처 : 지리산 대원사
글쓴이 : 반야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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