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여가는곳..

[스크랩] 사람과 사람 사이의 空

娘生寶藏 2012. 3. 18. 10:12

 

 

이성(異性)에 대한 관심도 이성(理性)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현종 詩 ‘섬’

연애는 근대(近代)의 발명품이다.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를 따르는 사회학도들의 주장이다.

중세만 해도 대다수의 결혼은 경제적 거래였다.

 종족번식이라는 지상과제의 이행을 목적으로,

여자라는 출산기계를 구입하는 일이었다.

혼인은 축복 이전에 의무였다.

산업혁명의 혜택을 누리면서 사람들은 개명했다.

국태민안(國泰民安)과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에

앞서 나만의 행복을 꿈꾸기 시작했다.

특히 임신을 과학적으로 조절할 수 있게 되면서,

 출산이 아닌 쾌락으로서의 성교가 보편화됐다.

결혼은 노동력의 교환을 넘어 인격의 결합으로 거듭났다.

 아울러 낭만적 사랑의 완성을 위한 지극히 사사롭고 내밀한 교류인 연애가,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했다.

인간은 자웅동체가 아니므로 연애야 인류사와 함께 출발했겠지만,

완연한 문화이자 기술로 정착한 것은 이때부터란다.

이성(異性) 혹은 ‘이성적 동성(同性)’의 환심을 사고 육체를 허락받을 요량에

소설가가 되거나 가산을 탕진하는 동물이 인간이다.
인간은 이상형을 만났다고 해서 무작정 달려들지 않는다.

체면의 무거움과 형법의 무서움에 연연하기 때문이다.

관습과 제도가 용인하고,

무엇보다 상대방의 이성(理性)이 납득할 수 있는 덕담을 속삭이며 점잖게 접근한다. 앞에 있는 사람이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똥’이 아니라,

오래 두고 먹을 만한‘된장’이라고 판단한 결과다.

 이성은 논리적이고 개념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능력을 뜻한다.

 오직 인간만이 진위(眞僞)와 선악(善惡), 미추(美醜)와 귀천(貴賤)을 구분한다.

 덕분에 다른 동식물 전체가 평생 노숙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때,

 전셋집이라도 구해 보일러나 에어컨을 틀고 지낸다.

‘가난’과 ‘불행’에 민감하다.

‘우리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고 할 때의 이성은 도처에 널려 있다.

 교도소가 원활하게 운영되고 화가들은 떼돈을 번다.

과장은 부장이 되기 위해 사장에 줄을 대고,

 이등병은 이등병답게 처신하면서 정의사회 구현과 복지대국 건설에 이바지한다.

욕망의 차별화와 눈치의 전문화가 이끄는 문명.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는

 ‘술이 웬수’라는 동네 김 씨의 넋두리만큼이나 파급력이 크다.

 누구나 그럴 법하게 여긴다.

 인간(人間)이란 단어 안에 이미 사회가 내장되어 있다.

 사람은 사람들 속에서 적응하고 소통하면서 사람으로 성장하고 사람으로 대접받는다. 남들이 끊임없이 자신을 호명하고 주시하고 평가해줘야만 존재감을 느끼는 인지구조의 훈습(薰習). 일각의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야 한다는,

개인의 희열보다 전체의 평안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암묵적 강요에 반발한다.

‘내가 나를 위해 태어난 건 아니지만,

적어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태어나지 않은 건자명하다’

는 확신 아래 사표를 던지거나 귀농에 나선다.

물론 그래 봐야 사회의 손바닥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직과 낙향의 극점에도 또 다른 사람이 모여 살기 마련이다.

말해야 하고 속여야 한다.

사람이 없어도 밥은 먹을 수 있지만 사람이 없으면 돈을 벌 수 없으니,

아무래도 떠나기 어렵다.

번뇌가 곧 보리

중생의 마음을 버릴 것 없이 다만 자신의 본성만 더럽히지 마라.

바른 법을 구하겠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청허휴정(淸虛休靜), 『선가귀감(禪家龜鑑)』

고등학생 시절,

당시 교련을 가르치던 교사는 특전사 출신이었다.

번개처럼 올려붙이는 ‘쌍(雙) 따귀’가 일품이었던 인물이다.

그다지 고약한 성미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앞두고 열린 첫 수업은 인성교육이었다.

잠자코 칠판에 ‘ㅅㅅㅅㅅㅅ’이라고 쓰더니 학생들에게 의미를 물었다.

 모르는 게 당연지사였고,

그는 의기양양하게 뜻을 풀었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그 다음 이야기는 예상하는 바다.

 매우 ‘교련’스러운,

 육군 중령에서 예편했으며 부업으로 전도사를 하고 있는 이력이 늘큰하게

묻어나는 훈시였다.

유익했지만 지루했다.

그는 말하고 나는 들어야 하는 사람다움은,

 철벽이나 무채색과 근친이었다.

그의 사람다움은 교사다움이었고,

 나의 사람다움은 학생다움이었다.

그는 그의 사람다움으로 봉급을 받았고,

나는 나의 사람다움으로 체벌을 면했다.

 완벽한 통제와 순응이 만들어내는 질서가 곧 아름다움이었다.

 유일한 아쉬움은 모두가 사람다웠지만 아무도 인간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혈질(낙천적이고 열정적이지만 성미가 급하고 경솔한 성격),

담즙질(의지력과 결단력이 강하지만 질투가 심하고 독선적인 성격),

우울질(예술적 감각이 뛰어나고 신중하지만 비관적이고 소심한 성격),

점액질(명랑하고 유머감각이 풍부하지만 게으르고 무책임한 성격).

히포크라테스가 분류한 인간의 네 가지 체질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저서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에 이를 인용하면서,

자연적 존재가 아닌 인격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물었다.

유전에 따른 기질을 극복하고 나름의 원칙과 내적 가치를 확립한 사람.

자신이 인간임을 스스로 확인하고 자부할 수 있는 지혜와 뚝심.

 곧 진짜 이성에 관한 화두다.

그러나 그 어떤 지혜와 뚝심도 마음의 그림자일 뿐이란 생각.

‘변혁’과 ‘변질’의 차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세계의 양상이 아닌 마음의 변덕에 달려 있다.

 하나의 생각을 깎고 다듬으면 걸작이 탄생하고,

그 하나의 생각을 버리면 행복이 도래한다.

 둘 다,

볼만하다.
『육조단경(六祖壇經)』은

중국 선종의 제6조 조계혜능(曹溪慧能) 선사의 법문을 모은 책이다.

교조(敎祖)인 부처님의 말씀이 아님에도 경(經)이라는 극존칭이 붙었다.

조사선(祖師禪)을 완성하면서 부처님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조사선 사상의 핵심은 인간을 향한 무한신뢰다.

그에게 불성(佛性)은 곧 인성(人性)이었다.

 사견을 붙여 요약하면 이렇다.

 인간은 보이는 것만 보고 들리는 것만 듣는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수 없고 들리지 않는 것은 들을 수 없다.

보고 듣고 맡고 맛보고만지고 생각하는 것들이 모여 세계를 구성한다.

 세계는 마음의 반영이고 마음의 총체가 세계다.

감정이 있는 유정물(有情物)들에게 마음은 숙명과 같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좇는 것들이라면 너나없이 마음의 길을 따른다.

빌어먹는 사람에게도 부려먹는 사람에게도 마음은 있다.

 마음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에서 중생과 부처는 털끝만한 차이도 없다.

자기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아는 것 외에 더 공부해야 할 내용은 없다.

수행을 위한 수행은 시간낭비다.

인간이길 포기해도 인간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바로 그대다.”

 “어떻게 깨닫습니까?”

 “아직도 발우에 손잡이가 없는 것을 귀찮아하는가.”


- 대룡지홍(大龍智洪), 『경덕전등록』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천변만화하는 인심(人心)에 관한 단상이다.

 “아무리 끔찍한 천재지변이라도 사람을 고의로 해치는 법은 없다.

사람은 작심하고 칼을 쥔다.

열 길 물속에 빠져죽는 일보다 한 길 사람 속에서 빠져죽는 일이 더 잦다.

사람은 대개 사람에 의해 횡사한다.

 반면 사람을 죽이는 것도 사람이지만 살리는 것도 사람이다.

 생판 남의 목숨을 구하고 대신 죽을 수 있는 짐승이다.

나무들이 고작 발바닥 밑의 양분이나 빨아먹을 때 인간은 우주와 교신한다.

인간은 만 갈래 이상으로 갈라질 수 있는 마음을 ''

지녔기에 비할 바 없이 위험하다.

그러나 위험의 빈도와 부피만큼 강력한 희망을 기대할 수 있는 게 또 인간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은 부질없다.

인두겁을 쓰고 벌이는 모든 말과 일과 생각이 지금 그대로 인간임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는 분노에 대해서도,

간단하고 확실한 대답을 갖고 있다.

 사람이니까 그러는 것이다.
불타 없어진 숭례문과 똑같은 건물을 다시 짓고,

천연덕스럽게 숭례문이라 부르면서 참담했던 과거를 지우는 게 사람이다.

 눈이 내리면 개는 마당을 뛰어다니고 사람은 시를 쓴다.

 마음에 내리는 비엔 물이 없는데,

생각은 젖어서 썩는다.

 인간은 고통을 문자화하고 갈등을 구조화하는 동물이다.

고통에 이름을 주면서 더 아파하고,

갈등에 명분을 붙이면서 더 다툰다.

 한편으론 이를 치유할 또 다른 문자와 구조를 개발해내려 부심한다.

전전긍긍의 총체가고금의 사상사다.

 ‘의미’를 입히고

필연’을 덧대며 망가진 삶을 수리하고 복원한다.

가장 끔찍한 공포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공포이고,

가장 슬픈 죽음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죽음이라고 믿는다.

조사선은 번뇌의 확대재생산에 대한 근본적 해법이란 점에서 인문의 극치다.

‘집착하지 말라는 것도 하나의 의미다.

 집착하지 않음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 게 진정한 무착(無着)’이란

가르침의 체득에 요즘 매우 즐겁다.
역사적인 양보와 역사적인 행패의 집대성이 곧 역사다.

인간에겐 인간답고 싶은 마음과 인간이길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혼재한다.

남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과 남을 위해 죽고 싶다는 생각은 동향(同鄕)이다.

어떤 인연을 만나느냐에 따라 거룩한 자비와 참혹한 광기가 번갈아 나타난다.

거기엔 순서도 없고 확률도 무의미하다.

역설적으로 인간이 저지른 최악의 상황은 최선의 상황도 꽃피울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

작은 역사는 가까이에서 자주 벌어진다.

사람이 없으면 외롭고 사람이 많으면 버겁다.

 그래도 많은 것보다는 없는 게 낫다는 지론이다.

사회는 세 사람만 있어도 구성된다.

 다수결이라는 정치와 고스톱이라는 문화,

 무엇보다 집단따돌림이라는 사회현상이 발생한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는 법이다.

사람에게 당하지 않겠다고 같이 싸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들의 멸시와 저주를 화끈하게 받아들일 때,

자아라는 마지막 생존자마저 목숨을 잃는다.

군대 시절 나를 무척이나 마뜩찮게 여기던 선임하사여,

나는 더 이상 ‘손잡이’를 바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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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섭 :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불교신문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길 위의 절』(2009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공부하지 마라-선사들의 공부법』,

『그냥, 살라』,

『떠나면 그만인데』

등의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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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붓다의 향기 뜨락
글쓴이 : 開經偈(개경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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