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꽃은 또 필 테고
- 여강 최재효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 세상을 마치 홀로 살아가는 듯 하늘에 닿도록 높은
담장을 쌓고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아무 상관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이웃들이
있다. 자신이 추구하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 타인에게 누추한 모습을 감추고
싶거나 혹은 힘들이지 않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여 그 기쁨을 혼자 만끽하고
싶을 때 그들은 더욱 담장을 높여 철저히 자신을 격리시키려 한다.
대학입시에서 고배苦杯를 마시고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상경한 소년은 자신을
철저히 고립시킨 뒤에 소왕국小王國의 주인이 되었다. 집과 학원만을 오가며 오
로지 자신의 미래와 가문의 명예만을 생각해야 했다. 감수성 예민한 시기에 객
지에서 혼자 지내며 책과 씨름하며 지낸다는 것이 어디 쉬운일이 던가. 마치 예
정된 운명 처럼 고향이 같은 이웃의 이성異性을 만나기 시작하면서부터 소왕국
의 육중한 철문은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봄날에 만나 이듬해 봄날에 헤어지기 까지 선남선녀는 친구와 이성의 야릇하면
서도 적절한 거리감과 경계를 유지해 가면서 함께 향수를 달래곤 했다. 자주는 아
니었지만 고향이 같다는 이유는 많은 것에 공감대를 형성하는 촉매제가 될 수 있었
다. 지고지순한 우정은 뜻하지 않은 이별로 미완의 동화로 남겨 되었고 33년 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잊고 살았다.
서로 가는 길이 다르니 당연한 결과라고 자위自慰하면서 소년은 신성한 국방의
무를 위해 떠나야 했다. 이성에서 어쩔 수 없이 벗으로 자리매김한 그녀는 어느
여름날 무의미하게 하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우리의 짧은 우정 사이에 친척 형
님이 거대한 장벽으로 서 있었다.
막 무르익어가는 남녀의 우정에 어느 한편의 친인척이 상대방의 혈족이 된다면
참으로 참담하다. 상대방이 이미 나에 대한 모든 사실을 속속들이 알고 있을 거라
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둘이 나누었던 - 약간은 포장된 - 이야기는 핑크빛
동화童話가 아닌 허구가 가미된 현실의 명백한 사정事情으로 판명될 수 있기 때
문이다.
2년 전 12월 초순, 산천이 온통 하얗게 뒤덮인 날 나는 장벽 같던 형님 장지葬地
에서 33년 만에 G를 만났다. 복사꽃처럼 화사하고 풋풋할 옛 모습을 기대해 오던
나는 충격을 받고 말았다. 형님의 관 위에 나란히 서서 삽으로 흙을 떠서 던지면서
도 내 옆에 서있던 미지의 여인이 형님의 처제가 된 G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조카를 통해 그 여인이 G였다는 것을 알고 한동안 우울한 심정을
가누지 못했다.
장지에서 나는 옛 모습의 G를 떠올리며 G를 찾고 있었다. 아무리 두리번거리며
33년 전 G를 찾았지만 앵두꽃 아름다운 얼굴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중년의 한
남자가 G와 비슷한 여인 곁에서 마치 호위병이라도 되는 듯 서 있었다. 나는 그
여인의 곁으로 다가가 ‘혹시 ** 아니냐?’고 물어 보고 싶었지만 당당한 그 호위병
때문에 포기하고 말았다.
나는 오늘 그 호위병의 빈소殯所에 다녀왔다. 아침 일찍 ‘**이모부가 돌아가셨어
요’라는 짤막한 문자를 받고 나는 하루 종일 고민하였다. 33년 전 귀엽고 발랄하며
입술이 통통했던 G와 2년 전 낯선 여인으로 변해버린 G를 동시에 떠올리며 먼 산
을 바라보기도 하고 ‘명동의 추억’을 회상해 보기도 하였다. ‘겨우 30년이 흘렀을
뿐인데......, 예쁘고 탐스럽던 복사꽃이 늦가을 서리를 맞은 국화로 변신되다니.’
나는 회사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빈소에 가야할 지 말아야 할 지를 두고
다시 고민하였다. 2년 전 G의 곁에 바싹 붙어서 나의 간섭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을
것처럼 단단해 보였던 남자에게 나는 몹시 불편함을 느껴졌었다. 그런데 그때 부터
남자는 간경화를 앓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영정 사진 속 고인故人에게 미
안해 했다. 33년 만에 부담 없이나는 G와 짧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꿈 많던 소녀에
서 세파世波의 흔적이 역력해 보이는 중년의 앙상한 미망인이 된 G의 모습에 나는
갑자기 콧날이 시큰거렸다.
“복사꽃 보다 예쁘고 꿈 많던 소녀는 어디 간 거야?” 마치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두 손을 마주 잡고 문상객을 맞고 있는 G에게 나는 모기 소리로 물었다.
“그대도 세월을 벗어나지 못한 듯 한데, 옛 모습은 그대로 있는 거 같아. 얼마 전
암수술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어. 괜찮은 거야?” G의 응수를 듣고 나는 잠시 문상
객 틈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도망치듯 빈소를 나왔다.
‘바보 좀 더 이야기를 나누면 안 돼?’ 집으로 향하면서 나는 수없이 자학自虐하였
다. 서로의 길의 걷다보니 옆지기와 풍우風雨도 맞고 월광月光도 밟았을 터. 하지
만 자식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비슷한 처지로서 나는 그저 옛 우정을 생각해야만
했다.
인생 100년 중 옆 사람과 진지하게 대화하면서 몸을 비비고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많은 부부들이 갈등하다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하거나 가면을 쓴 채 억
지 미소를 짓기도 한다. 혼인서약은 하늘나라의 지엄한 국법國法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누구나 자신만의 견고한 성城을 가지고 있다. 운명적으로 타고나면서부터 철옹성
鐵甕城의 성주城主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스스로 성城을 쌓고 허물면서 같
은 행동을 무의식중에 반복하면 살아간다. 부부 혹은 부모 자식 간에 성 쌓기는 위험
천만하다. 사회의 분위기는 부부의 친밀도親密度에 따라 변한다. 부부금슬에 이상이
없을 때 건전한 사회가 형성되고 수시로 풍파風波가 이는 집안이 많아지면 사회
역시 중병重病을 앓기 쉽다.
경우에 따라 우정이 애정으로 변하고 애정이 탄탄한 주춧돌이 되어 화목한 가정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봄이 오고 꽃이 피었지만 나비가 날아들지 않으면 무슨 소용
있으리. 돌아보면 나 역시 수많은 성을 쌓고 허물기를 반복 하였다. 지금도 몇 개의
성이 견고히 존재하고 있으며 새롭게 성을 신축 하고 있다.
지난해 봄에는 오랜 세월 함께 쌓던 성이 무너지는 바람에 나는 심신心身에 치유할
수 없는 불치병의 상흔傷痕이 확연하게 남아있다. 수원수구誰怨誰咎하랴. 대개의 사
람들은 불운不運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 한다. 물론 자신의 탓임을 너무도 잘
알면서 일부러 지나가는 행인이나 하늘 탓을 하고 있다. 내 탓을 네 탓으로 돌리려
하는 행위는 거대한 지구의 자전축을 거꾸로 세우려고 하는 행동과 무에 다를까.
요즘 들어 산에 홀로 가는 묘한 버릇이 생겼다. 산 정상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웃다가 울다 찬가도 불러보고 비가悲歌도 불러 본다. 어떤 산인山人은 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보기도 한다. 산새와 더불어 수작酬酌을 하다 보면 응어리 하나
떼어 놓고 바람과 대작對酌하다보면 성문을 활짝 열기도 한다.
G가 30년 세월동안 쌓은 견고한 성을 깨고 푸른 하늘을 보고 바람과 구름이 자유
롭게 머물 수 있는 아름다운 성의 성주가 된다면 여생餘生은 이전의 음울陰鬱의 그
림자에서 크게 벗어날 수 있으리라 본다. 도미노현상처럼 보이지 않는 우리 이웃들
견고한 성이 하나 하나 사라지거나 최소한 문턱이 낮아지면 어떻게 될까.
옛 친구의 옆지기 빈소와 다녀온 나는 또 괜한 망상에 빠져 부질없이 소년이 되
기도 하고 푸른 머리의 청년이 되기도 하면서 거울 한번 보고 허망하게 웃어본다.
복사꽃 보다 더 화사했던 소녀는 간데없고 보름달 같던 늠름한 선랑仙郞도 어디
갔는지 종적이 묘연하다. 도대체 누가 소년 소녀를 데려 갔는가.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유한의 천수天壽는 쏜살 보다 더 빠르게 지나가고 올해도 도화桃花는 요
염할 텐데......
- 창작일 : 2013.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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