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여가는곳..

Re:길에서 _ 김용택|

娘生寶藏 2019. 8. 4. 18:28

앞산 뒷산
오월 푸른 산을 바라보건대
그 사이 앞내가 푸르르고
그 안에 살아온 내 몇 해가
하루 해 같아
오늘 해는 유난히 짧고
해 지는 산마루에 눈물이 걸려
반짝 비치는구나.
무엇을 아끼고
무엇에 정 붙여 살았느냐
맑은 바람은 이리 부드럽게
야윈 뺨을 스치는데
내게 오고 가고 무엇이 머무느냐.
생각하면 누구나 살아온 이 세상이
피눈물을 쏟던 설운 굽이인데
찔레꽃 떠내려가는
어느 물굽이에서
내 서러움만 가려서
떠 보이겠느냐.
철이 들면서 나는
앞산 빈밭 거름더미만 보아도 정에 겨웠고
홀로 밭 매는 어머니만 먼 데서 보여도
밭이 너무 커서 서러웠다.
어디 갔다가 늦게 돌아오는 저녁길
동구에 들어서서
어머님 등불만 보여도
나는 늘 가슴이 새롭게 튀고
발길이 부산해졌다. 떨리는 마음으로
어머니, 부르며 마당에 들어서면
오냐 내 새끼 인자 오냐, 문을 열면 환한 어머님 불빛
나는 늘 행복해 웃었다.
홀로 풀짐 지고 산굽이 돌아오는
아버지만 길에서 만나도
강길이 너무 적막하여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강변에 풀꽃만 피어도
강물에 눈만 내려도
강변을 거닐며,
꽃곁에 앉아
눈 사라지는 강가 바위에 앉아
나는 이 세상을 사랑했다.
정자나무 잎 피고
그 아래 앉아
소쩍새 이 산 저 산에서 울고
둥근 달이 떠오르면
나는 사람 하나 이 세상을 떠난 자리가
그렇게도 넓어
긴긴 밤 달 져 내 방에
새벽 어둠 들 때까지
사랑에 목이 매어
물소리를 따라다니며
바위 뒤에 숨어 혼자 울었다.
사랑이란 무엇이고
삶이란 무엇이냐.
살아오면서 나는 내 이웃들의 농사에
내 손이 희어서 부끄러웠고
뙤약볕 아래 그을린 농사군들의
억울한 일생이
보리꺼시락처럼 목에 걸려
때로 못밥이 넘어가지 않아
못 드는 술잔을 들곤 했다.
논밭에 땀흘리지 않고
흙 무서워하는 손으로 시를 쓰고
밥을 퍼먹으며
그들의 아들딸들을 가르치며
나는 가르침에 괴로왔다.





지던 해 졌구나.
눈 내리깔아 땅을 보건대
우리 땅 어디에는
아픈 흔적들이 몸을 쑤시고
갈 수 없는 곳에 머물러
몸과 마음이 갑갑하구나.
세상을 배우면서 나는
갈라진 내 조국에 눈뜨며
결코 쓰러질 수 없는 사랑을 배웠다.
땅 가까이 헤어져야 할 것들이 너무 많고
땅에 만나야 할 것들이
한치 땅 위로 푸르게 설레인다.
내 세월도 한 겨레의 세월과 같아
세월은 많은 것들을 용서하고
많은 것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한번 왔다 가는 이 세상
사람이 살며는 얼마나 살며
살아 또 무엇을 이루겠느냐.
내 용서할 수 없는 것들에
비겁하지 않으련다.
이 세상 맨땅을 디디려
이 세상 허망한 데를
다 몰아 다니다가
다시 서니 앞산 뒷산 내 강토가
내 몸에 가깝고
그 안에 작은 들에서
모내는 사람들의 몸짓이 바르게 보이는구나.
내 옷소매를 걷어올리고
반달만큼 남은 논배미에 들어선다.
내 딛어 발 빠진, 물려받을 농토가 너무 서럽고
인간만사 세상 인심이
땅에 너무 야박하나
땅은 유구하고 곡식 또한 그렇다.
우리 진정한 사랑의 시선이
서로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자유이듯
이 한 짐 짐짐의 무거운 사랑
, 사랑의 가벼움이여, 자유여
자유를 찾으며 울먹이는 흙 속에
줄모틀 꽂는다.
모를 다 내고 논두렁에 서 보니
모들이 나란히 어여쁘고
나도 오랜만에
저녁 한 끼 밥값을 한 것 같구나.
아버님은 벌써 풀 한 바작을
못밥닽이 고봉으로 수북이 쌓으셨구나
삶이여!
저 위에 무엇을 더하고 덜하겠느냐.
아버님 풀짐에 나비 두어 마리 따라 날고
강변 풀꽃들이 더욱 다정히 피어나며
아버지 가시는 길에 길이 따른다.
하얀 길을 가운데 두고
이 세상 모든 것이 서로 정답게
수고했다 마중하며
마을로 길을 내어주고
모내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마을길로 접어드는구나
내 흉년의 저 길을 가리라.


[출처]

김용택 시집 _섬진강 [창비시선46]

글쓴이;무주선원;김종랑

 

 

Along The Crystal Shore - Marc Enfroy비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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