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명상

[스크랩] Dr.K 대중견성강설▶⑪ 붓다 사띠- 윤회의 실상을 보라 ! 神의 세계를 넘어서라 !

娘生寶藏 2012. 11. 30.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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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 바라밀, 우리도 부처님 같이...

 

 

 

원 불자님들 안녕하셔요. 다들 평안하신지요?

 

지난 11월 18일  안산 화엄사에서 김 재영 법사님의 올해 마지막 "대중견성강설"이 있었습니다. 

이번 강설은 '윤회의 실상'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타종교의 생명관과 불교의 생명관 대한  

속시원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우리 불자들은 "神 같은 것은 없다, 창조主 같은 神은 없다'"고 우리 스스로도 말해왔고,

타종교인들에게 주장해 왔습니다.

 

특히 불교를 좀 공부하신 분들중에는 "불경 속의 神들은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불교가 변질된 것이다.

붓다는 神의 존재를 부정하셨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물론 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것은 분명 불교를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고, 대부분의 불자들의 실제적

인 신앙행태와는 맞지 않는 면이 많있던 것이 사실입니다.

 

'타력신앙과 자력신앙‥‥'

'부처님과 타종교의 神‥‥'

 

 

자~ 이제 老 법사님은 이에 대해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함께 들어보실까요?   

 

감사합니다. ^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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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K 대중견성강설▶

⑪ 붓다 사띠- 윤회의 실상을 보라!의 세계를 넘어서라!

 

 

 

 

 

 

 

<불교대학 강의자료>

 

                 염불기도는 부처님의 생명 에너지 꺼내쓰는 것

                                                                                                 전법 김재영

 

 

 

6) 또 우리는 신(神)들과 더불어 빛나는 생명력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성(神性)/영성(靈性)입니다. 신(神)의 생명력입니다.

우리는 신성적(神性的) 존재입니다.

우리는 영성적(靈性的) 존재입니다.

신비한 신(神)/신(神)들의 생명력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신비한 하느님/하나님의 생명력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붓다가 설한 ‘여덟 가지 빠리사(八衆)’ 가운데, ‘사천왕 빠리사’ ‘범천/하느님/하나님 빠리사’가

함께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친구 여러분, 우리 생명은 본래로 불성(佛性)입니다.

우리는 본래 불성이며 신성(神性)/영성(靈性)입니다.

법당에 불단(佛壇)/신중단(神衆壇)이 함께 있는 것도 생명의 이러한 신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불교의 전우주적 동체적 생명관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친구 여러분, 불교는 결코 무신론(無神論)이 아닙니다.

불교는 신(神)/하느님/하나님을 껴안고 함께 갑니다.

이들 신(神)/하느님/하나님을 인도하여 부처님의 세계로 나아가게 합니다.

 

 

7) 신(神)/신(神)들은 거룩하십니다.

 

신(神)/신(神)들의 사랑은 거룩하십니다.

하지만 신(神)/신(神)들은 ‘나의 것’ ‘나’라는 집착[我相]을 벗어나지 못 합니다.

‘창조주 여호와’ ‘오직 하나뿐인 하나님/하느님’이라는 욕심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창조하고 심판합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구원하고 믿지 않는 자는 심판하고 징벌합니다.

 

그런 까닭에 신성(神性)/영성적(靈性的) 생명에는 집착이 있고 욕심이 있습니다.

신(神)/여호와/하나님/하느님은, 전제군주 같이, 그 위엄이 거룩하고 전지전능하지만, 그 구원에

는 한계가 있고, 사랑과 증오, 은혜와 보복/징벌이 늘 함께 작동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빌고 순종/순명함으로써만 은사(恩賜) 받습니다.

평화와 안식을 얻습니다.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이 평화와 안식은 유용한 것입니다.

큰 위로를 받고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 은사(恩赦) 속에는 항상 죄의식(罪意識)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나는 죄인이다‘라는 죄의식이 잠재해있고, 창조주 하나님/하느님의 심판을 받을지 모른다는 공

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 죄의식/공포가 인간을 끊임없이 극단주의로 몰고 갑니다. 그래서 지

극히 사랑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잔인하게 살육하고 파괴합니다. ’성전(聖戰)' ‘영전(靈戰)’이란

이름으로 눈뜨고 사람 죽이는 살육전쟁을 끝없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2천년 기독교의 역사이고, 이슬람의 역사입니다.

 

 

8) ‘나는 신(神)을 보았다.

 

나는 매일 기도하면서 하느님/하나님을 본다. 그 목소리를 듣는다.‘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신앙적 감흥 속에서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 것이 아니라, 그렇게 느낀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 의식(意識)작용에 따라 그렇게 보고 그렇게 느낀 것일뿐,

결코 본 것이 아니지요.

 

‘본다’는 것은 ‘누구든지 다 본다’는 것 아닙니까?

눈 있는 자는 누구든지 볼 수 있을 때 ‘본다’는 것이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신(神)을 본다.’

‘하느님/하나님은 있다, 존재한다,’

이것은 의식(意識)의 문제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생각의 문제/의식(意識)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믿고 어떻게 생각하며 살아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종”이라는 생각으로 살 것인가?

절대자의 “도구”로, “죄인”이라는 의식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주인”이라는 생각으로 살 것인가?

부처님과 평등한 존엄한 “주인”이라는 의식으로 살 것인가?‘

 

친구 여러분,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대는 어떤 길을 선택할 것입니까?

‘종/죄인의 길’입니까?

‘주인/부처의 길’입니까?

 

 

9) ‘나의 것’이라는 생각에서 해탈하고

 

‘나’ ‘나의 자아’라는 어둔 이기적 생각에서 영영 해탈하고–

부처님은 ‘나의 것’을 버리고 우리들과 함께 합니다.

아니, 우리들 자신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 하나하나를 당당한 생명의 주인공으로 일으켜 세우십니다.

신(神)/여호와/하나님/하느님의 권능이 침범할 수 없는 존엄한 생명의 주인공으로 일으켜 세우

십니다.

 

그래서 나는 피조물이 아니라 빛나는 주인이 됩니다.

‘은혜 속의 주인’이 됩니다.

부처님․신(神)들의 풍성한 은혜 속에 살면서도

부처님․신(神)들과 더불어 어께를 나란히 하는 당당한 주인 됩니다.

 

우리는 지금 이 놀라운 생명의 진실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어둔 생각[無明識]에 가려서, '나의 것’이라는 어둔 생각[我相, atta-saññā/앗따 산냐], 곧 탐욕에

가려서 이 진실을 보지 못하고 가난하고 병들고 죽어가는 초라한 한갓 중생으로 전락해 있는 것

입니다.

 

염불기도는 내가 주인 되는 신성한 종교적 체험입니다.

염불기도는 내가 부처님과 더불어 청정한 생명력[佛性]을 공유하는 신성한 종교적 체험입니다.

염불기도는 우리가 부처님의 신비한 능력/불성, 곧 지혜와 자비의 에너지를 내어 쓰는 놀라운 신

앙적 체험입니다.

염불기도는 우리 자신의 생명력을 무한으로 확장시키는 경이로운 창조적 체험입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지장보살’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부를 때, 광명찬란한 생명 에너지가 분출합니다.

내 자신 속에 매몰되어 있는 위대한 생명 에너지–불성(佛性)/‘불광(佛光)’이 장벽을 뚫고 솟구쳐

오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의 기복(祈福)입니다.

바로 이것이 놀라운 기복불교의 신비입니다.

 

 

10) ‘나무붓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지장보살’ ‘나무아미타불’–

‘나무(南無)’는 ‘namo/나모’를 소리대로 옮긴 것입니다.

‘namo'는 ’귀의합니다‘ ’의지합니다‘, 이런 뜻입니다.

 

‘나무붓다’는 ‘붓다께 귀의합니다’ ‘부처님께 의지합니다’, 이런 뜻입니다.

‘나무석가모니불’은 ‘석가모니불에게 귀의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 의지합니다’, 이런 뜻입니

다.

‘나무관세음보살’ 등은 ‘관세음보살님 등 불보살님께 귀의합니다’ ‘불보살님들께 의지합니다’, 이

런 뜻입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namo/나무’는 부처님/불보살님의 이름[名號]을 부르면서 부처님/불보

살님께로 돌아가 부처님/불보살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아니, 부처님/불보살님 그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 찬란한 능력을 쓰는 것입니다. 부처님/불보살님의 광명찬란한 자비를 내어 쓰는 것

입니다.

 

‘namo Buddha'는 곧 ’Buddha–sati'입니다.

‘namo' Buddha'는 곧 ’Buddha–sati'의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namo Buddha'는 부처님 지켜보면서 부처님/불보살님의 불멸의 자비, 불멸의 생명력을 공유하

며 내어 쓰는 신비한 방법입니다.

 

‘namo', 이것은 신비한 주문입니다.

우리 속의 무한한 생명 에너지, 창조적 에너지를 불러내어 Tm는 신비한 주문[神呪]입니다. 빛나

는 주문[明呪]입니다. 위없는 주문(無上呪)입니다. 가장 뛰어난 주문[無等等呪]입니다.

‘namo Buddha/나무붓다'

[‘namo Buddha'는 ‘namo Sammasambuddhassa/나무삼마삼붓닷사’란 표현을 줄인 것이다. ‘namo

Sammasambuddhassa’는 ‘바르게 깨달으신(正等覺)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이런 뜻이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지장보살’ ‘나무아미타불’–

 

친구 여러분, 이렇게 소리 높이 외쳐보십시오.

저 푸르른 하늘을 향하여 이렇게 소리 높이 외쳐보십시오.

거기 곧 부처님의 빛나는 모습이 드러날 것입니다.

부처님/불보살님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대 몸이 부처님/불보살님의 광명으로 환–하게 빛날 것입니다. (끝)

 

 

 

붓다 메신저 - 청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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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붓다의 향기 뜨락
글쓴이 : 일행거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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