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강설무비큰스님·대새선사의 행장

[스크랩] 허사리 수원(許司理 壽源)에게 보낸 답장 1-5

娘生寶藏 2013. 6. 4. 09:49

허사리 수원(許司理 壽源)에게 보낸 답장 1-5

 

李文和都尉 叅石門慈照할새 一言下 承當하야 便千了百當하고 嘗有偈하야 呈慈照云 學道 須是鐵漢이라사 着手心頭便判이니 直取無上菩提인댄 一切是非莫管이라하니 但從脚下崖將去하야 死便休언정 不要念後思前하며 亦不要生煩惱 煩惱則障道也리라 祝祝하노라

 

옛날에 이문화 도위(李文和都尉)가 석문자조(石門慈照) 선사를 참례하고 한마디 말에 곧바로 받아드려 감당하여 천 가지나 깨닫고 백가지나 알아버렸습니다. 일찍이 게송을 지어 자조 선사에게 바치기를, “도를 배우는 것은 모름지기 무쇠로 된 사람이라야 마음먹자마자 곧 판단해 버리느니라. 바로 최상의 깨달음을 취하려고 한다면 일체 시비를 관계하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지금 당장으로부터 밀어부처서 죽어야 쉴지언정 지난날을 생각하고 앞일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또한 번뇌도 내지 마십시오. 번뇌는 도를 장애합니다. 빌고 또 빕니다.

 

강설 : 깨달음에는 선후가 없다는 사례를 한 가지 들었다. 이문화라는 사람이 석문자조 화상을 친견하고 출가에 대한 일을 물었다. 석문 화상은 다시 최공(崔公)이라는 사람이 경산(徑山) 화상에게 출가에 대하여 물은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경산 화상은 이렇게 말했다. “출가란 대장부의 일이다. 장군이나 제상들이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답하였는데 그 말을 들려주었더니 이문화가 단박에 깨달아버렸다. 그리고는 게송을 지어 올렸다. “도를 배우는 것은 모름지기 무쇠로 된 사람이라야 마음먹자마자 곧 판단해 버리느니라. 바로 최상의 깨달음을 취하려고 한다면 일체 시비를 관계하지 말라.”라는 것이다. 그렇다. 선불교에서 설정해 놓은 깨달음의 경지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무쇠로 된 사람이라야 근기가 된다. 세상의 온갖 시시비비나 부귀공명에 마음이 있어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근기라면 거리가 멀다. “지금 당장 밀어부처서 죽어야 쉴지언정 과거를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참으로 참선불교의 정곡을 찌른 말이다. 한번 시작했다면 이제는 죽어야 쉴 각오를 하라. 죽기 전에는 사람 노릇할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 그것을 한번 청산에 들어가서 다시는 나오지 않는다[一入靑山更不還].”라고 표현한 것이다.

선불교에서 화두를 들고 어떤 경우에라도 일념이 되게 하는 일은 이와 같이 어렵다. 무쇠로 주조한 근기라야 될까 말까다. 그래서 쇠말뚝과 같은 사람이라는 말도 있다.

요즘의 한국불교는 화두를 들고 의심을 지어가는 간화선 불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국불교의 특징이며 장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공부를 해서 대혜 선사가 설정해 둔 그 기준에 이르러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이 있다는 소식은 1960년 이후로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 이전은 내가 모르는 시기이기 때문에 언급할 수 없다. 내가 고우스님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인데, 이 문제가 너무나 답답하여 2000년을 전후한 어느 날 남원 실상사에서 토론이 있던 때에 누군가가 한국의 대표선사 성철스님은 깨달았느냐는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좌장이던 고우스님이 성철스님의 상좌 원택스님에게 미루었다. 원택스님은 성철스님의 저서 백일법문 상권 30쪽 밑에서 여섯째 줄에 참선을 익히면서 중이 된지 벌써 삼십년이 지났습니다만 그저 세월만 허송하고 말았습니다.”라는 구절을 읽어줬다고 하였다. 깨닫지 못했다는 뜻이다. 오로지 깨달음에 대한 큰 꿈만으로 세월을 보내야 하는가? 아니면 선불교에서 새로운 대승불교로 돌아가야 하는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연구해야 할 문제다.

 

 

 

출처 : 염화실
글쓴이 : 無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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