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에 휩싸인 채 아이를 대하지 말라
친애하는 부모님 여러분,
어느날
길을 걸어가다 어떤 장면이 눈에 띄었는데 제가 보게 되리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래 동안 제 마음 속에 하나의 영상을 각인시켜 놓았습니다.
그 영상은 제가 그날 그 일에 대해 괴롭게 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수많은 다른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게 무엇이었는지 한번 알아맞춰 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은 그 일이 벌어지는 장면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짐작을 해 볼
수가 없겠지요.
사실상 이런 류의 일은 항상 벌어지지만 여러분은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해드리죠.
그 장면은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 장면은 한 작은 집에서 연출되었습니다. 그
집은 초라한 집으로 주인이 넉넉하지 않음을 말해주었습니다.
집안에는 가구라 이름붙일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집의 가장(家長)은 여전히 바깥에서 일을 하고 있음인지;;
어머니만 집에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임신한지 7개월쯤 된 상태였습니다.
두 살이 채 안된 어린 남자애가 하나 있었죠.
엄마가 그를 을러대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몸의 곳곳을 엄마가 휘두르는 회초리에 맞아
고통스러워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자기 감정이 내키는 대로 마구 계속 때렸습니다.
그 어린애는 고통 속에서 그저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으며 끝간데 없이
울부짖을 따름이었죠.
그 엄마는 분노에 압도되어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으므로
난청이거나 완전히 귀가 먹은 듯이 보였습니다.
여인은 완전히 녹초가 될 때까지 아이를 계속 때렸고,
어린 아이는 너무도 고통스러워 가만히 누워있자니 갸녀린 흐느낌
말고는 더 이상 울 수도 없었습니다.
엄마는 여전히 꾸짖고 있었습니다.
“그만 두라고 말했잖아. 왜 그만 두지 않아?
네놈은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냐?
도대체 애미 말을 듣지를 않아. 널 때려 죽이고야 말 거야.
” 여인이 말하는 동안 그녀의 얼굴은 인간의 얼굴이라 말하기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토록 중한 벌을 달게 받을 만큼 그 어린 아이가 무슨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을까요?
아이는 개구장이였고 밥 그릇을 깨었던 게 이유였습니다.
그들 가족은 먹을 게 많지 않았으므로 소년이 밥그릇 하나를 못쓰게
만들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엄마가 아이를 무자비하게 때렸던
것입니다. 그 일을 생각해보면 참 딱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 소년이 정말로 잘못한 것일까요?
여러분 모두 잠시 이 점을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소년은 밥그릇이 귀중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릇을 깨뜨렸을까요?
아니면 그릇을 가지고 놀다가 마치 비행접시처럼 내던지다가 깼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어린애는 자기 밥을 다 먹은 상태였죠.
아이는 자기 밥그릇을 물로 씻으려 했습니다.
아이는 어른들이 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씻는 모습을 보았으므로
어른들처럼 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도 역시 어른처럼 하고 싶었지만,
그릇이 떨어져 부서지지 않을 만큼 손의 힘이 세지 못했습니다.
아이는 그릇을 고의로 깨뜨리지 않았습니다.
소년의 어머니는 아이의 습성에 대해 전혀 몰랐습니다.
그녀는 아무런 절제력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감정에 휩싸였고 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녀는 다시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자기 아들의 어린 몸뚱아리를 내리쳤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엄마의 행동을 분석해 본다면 !!
여러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녀 가족의 가난함, 집에 별로 머물러 있지 않는 남편,
아내와 아이를 위해 충분할 정도로 돈을 벌지 못하는 남편,
그 빈약한 수입조차 위스키를 사는 데 쓰거나 사탕 한 알도 얻어내지
못할 정부 복권을 사는데 써버리는 남편.
이러한 모든 요인들이 가족문제에 덧붙여져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집안의 여성은 불안정한 느낌에 사로잡힙니다.
그와 같이 내면적으로 편치 않은 느낌을 가지게 되니 ;;
사소한 일이 일어나도 그녀 스스로가 지핀 불길의 소용돌이 속에서
분노하는 일은 너무도 뻔한 일이었습니다.
나쁜 결과는 순진무구한 아이에게로 닥쳤습니다.
그가 전생에 죄를 저질렀을 수도 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필시 그런 여인의 자궁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겠죠.
그는 틀림없이 나쁜 업을 지었을 테고 그로 인해 앞서와 같이 가족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부모들을 만났겠죠.
모든 사람이 업의 결과에 직면해야 합니다.
법(Dhamma)을 생각해 본 연후에,
저는 약간이나마 실상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이해하는 사람한테나 도움이 될 뿐 그 결과로
고통받아야만 했던 어린 아이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아이의 앞에는 여전히 살아가야 할 수많은 나날들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여러분에게 자녀들에게 가하는 처벌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제 이야기를 좀 하죠.
제가 여전히 어린 소년이었을 적에 저는 꾸지람을 듣고 볼기를 맞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공손함과 친절함을 훨씬 더 좋아했습니다.
꾸지람을 들은 날에는 밥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선 이런 사실을 아시고 절대로 저를 너무 가혹하게 꾸짖지는
않으셨습니다.
어머니께서 화가 나시면 맨손으로 제 엉덩짝을 두 세 차례 후려치는
정도였습니다. 아버지는 결코 제 볼기를 치신 적이 없으셨어요.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든 아버지께서는 저를 밤에 가르치시곤 하셨죠. 또는 이따금 아버지께서는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그저 간접적으로 충고해주시곤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 품안에서 행복한 소년으로 자랐습니다.
그러나 제 누나들 중 한 누나가 항상 저를 혼냈습니다.
누나가 저를 혼낼 때마다 어머니는 항상 저를 그만 꾸짖고 상냥하게
대하라고 누나를 나무랐습니다.
그러다 저는 삼촌 루앙룽께서 계시는 한 절에 가서 살았습니다.
루앙룽은 엄격한 수행자로 말 수가 적었습니다.
그는 항상 근엄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누구한테고 그다지 말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강제로 순응하도록 강압하여 일처리하기를
훨씬 더 좋아하는 구식 방법을 따랐습니다.
저는 그분과 함께 지내는 일이 편치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아이라면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자기 식대로 편하게 아이를
대했던 셈입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그런 줄을 몰랐습니다.
저는 그가 두려워져서 때때로 절에서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저는 항상 절에 붙들려 왔습니다.
저는 볼기를 흠씬 두들겨 맞고서 또 다시 도망쳤습니다
. 너무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서 저는 절에서 완전히 떠나버리기로
마음 먹었죠.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저를 집으로 데려가고 싶었지만 저는 집으로
돌아가는 데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볼기맞을 일이 너무도 두려웠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새로운 학교로 옮겨 갔습니다.
1학년, 2학년 시절은 모든 게 순조로웠습니다.
3학년이 되자 다시 아주 엄격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분 역시 아이들의 볼기치기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저의 오래된 열병이 다시 도졌습니다. 저는 다시 학교를 도망쳤습니다. 저는 붙잡혔고 선생님은 제게 왜 수업을 빼먹었냐고 물었죠.
선생님이 저를 때리기 위해 자주 사용하시는 회초리가 두려웠노라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웃으시곤 더 이상 때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곤 매일 학교로 출석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했고 그 선생님은 정말로 저에게 매를 치는 일을 그만
두셨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계속 공부를 해서 초등교육을 마쳤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왜 개인적 이야기를 하는 걸까 의아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저 너무 엄격하게 벌을 주는 위험성을 여러분에게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보통 우리 모두는 마음 속에 두려움의 본능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의 기술로서 공포를 사용한다고 하면,
공포의 방식은 아이들을 너무 무서워하게 만듭니다.
아이들은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을 겁니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들은 집에 있고 싶어하지 않을 테죠.
아이들은 아버지, 어머니 등 보호자들을 몽땅 적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한테서 멀리 떨어지려 노력할 테고 지나치게 멀어지면서 많은 아이들은 나쁜 물이 들게 될 테죠.
극장 앞에서 서성거리는 아이들 대부분은 !!
아버지와 어머니가 협박하는 방법을 사용했던 집안 출신입니다.
만일 우리가 증오에 가득차고 사악했던 사람들의 역사를 살펴볼라치면, 그들이 대체로 똑같이 증오심에 불타고 사악했던 아버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이들을 벌줄 때 조금은 조심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잘못하는 모습을 보는 부모들 가운데는 자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기까지 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부모들은 어디고 가리지 않고 몸뚱아리 아무데나 그저 마구 매를
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따금 아이들은 이런 벌을 받아서 청각이나 시각을 잃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순진무구하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아이들은 옳고 그른 게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아이들은 항상 어른들을 따라하고 어른들을 본뜹니다.
무분별한 어른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잘못 수행했음에도 잘못은 깨닫지 못한 채 아이들이 자신들의 그릇된 행동을 목격하도록 방치했기 때문에,
어른들은 아이들보다 훨씬 볼기를 맞아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무분별한 어른들은 화가 나서 아이들을 벌줍니다.
그런 어른들의 행동에는 개선되어야 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화가 나 있는 동안에는 결코 아이들에게 벌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세요. 그럴 때 아이들에게 벌을 주는 경우,
어른들은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어서 저질러진 잘못에 비해 대체로 처벌이 너무 지나치게 가혹하기 때문입니다.
몇 일전 신문을 보다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는데
, 이 여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아이들을 고문했고 방식 하나하나가 모두
잔인했습니다.
그런 여성들은 악마라 불리워지며 보통의 여성이 아닙니다.
화가 나면 이렇게 말하는 여성도 있습니다.
“네놈들 고기를 먹어버리고 싶어.” 이런 말은 인간의 말이 아닙니다.
그런 말은 사람의 정신을 장악해버린 악마의 말입니다.
악마가 여러분의 자녀들을 벌주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우선 여러분의 정신으로부터 악마를 쫓아내도록 애쓰십시오
. 우리는 왜 아이들을 벌줄까요?
이 질문은 맨 먼저 대답할 필요가 있는 질문입니다.
벌을 주어 아이들을 개선시키고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 해답입니다.
벌의 목적은 아이들로 하여금 잘못을 저질렀으니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야겠다고 깨닫도록 만들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제를 분명하게 전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이점을 고려하십시오.
이런 저런 짓을 저지르는 일은 잘못이라는 점을 여러분의 어린 자식들이 인식하도록 해줄 다른 방법은 없을까?
회초리를 대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행동의 원인을 찾아내야 합니다.
왜 아이들이 그런 짓을 하고 싶어할까?
왜 아이들은 어른들한테 돼먹지 않았다는 소리를 듣는 그런 식으로
행동을 할까? 그들의 장난끼는 그간 피해를 끼쳤을까?
그 이유를 알아내고자 힘쓰는 법을 배우십시오.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던 아이들에 대해서 우리는 맨 먼저 왜 그들이
그런 짓을 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누군가로부터 본을 받아 배웠음이 틀림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나쁜 본이 무언지를 알아냈다면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잘라 없애야만 합니다.
보모가 그 본이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녀가 다시는 아이들 앞에서 그런 짓을 하지 말게끔 해야 합니다.
이것은 아이들로부터 나쁜 본보기를 격리시키는 방법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아이들에게 상냥하게 일러주어야죠.
그런 짓을 하는 건 나쁘며,
그러다간 그들이 나쁜 사람이 된다는 점을 아이가 인식할 기회를
주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다시 그런 짓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널 사랑하길 원하니?
만일 네가 우리의 사랑을 원한다면 부디 그런 짓을 다시는 하지 말거라.”
이것은 아이들이 똑같은 잘못을 다시 저지르지 않도록 만들기 위한
경고입니다.
무언가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을 대할 때 그런 짓을 하도록 그들을
꼬드기는 유혹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 또한 이해하십시오.
아이들은 아무런 유혹도 없이 잘못된 일을 저지르진 않습니다.
그런 유혹을 찾아내서 아이들로부터 제거하도록 애쓰십시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은 다시는 그런 종류의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벌줄 필요가 없으며 아이들로 하여금 의기소침해지도록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이 그런 잘못으로 인해 상처받을 필요 역시 없습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의 장난끼에 짜증을 내는 일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어른들은 항상 불평합니다.
“이 어린 녀석은 너무 장난을 쳐.
요놈 때문에 매일같이 머리가 돌 것만 같애.”
우리는 그와 같이 양 측면에서 불평을 해대는 오만한 어머니들의 말을
자주 듣습니다.
어떤 다른 아이가 인형처럼 조용하면 그 거만한 어머니는
“제 엄마는 참 행복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아이들은 천성적으로 가만히 있질 못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런 애들은 진짜 아이들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아이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두 가지 모든 면에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쏘다니기를 멈춘다면,
그들 신체의 여러 기관들은 발육을 멈춥니다.
그러므로 짖궂음은 아이들의 천성입니다.
하지만 보모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신경을 씁니다.
그들은 아이들을 너무 지나치게 도우려 애쓰는 나머지 아이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올바른 방식이 아닙니다.
유모의 의무는 그저 아이들을 보살펴주고 아이들이 확실하게 해를
당하지 않도록 해주는 일일뿐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자유를 좀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장난 좀 친다고 불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일정 정도의 규율은 반드시 있어야만 하겠죠
. 또한 약간의 보상도 있어야만 합니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들은 당연히 걷기를 좋아합니다.
자전거 타는 법을 막 배운 사람들을 살펴보세요.
그 사람들은 손에 닿을 수 있는 자전거면 어떤 자전거든지 타고 싶어
안달이 나 있습니다. 그들은 더 많은 경험을 쌓고,
더 능숙하게 되고 싶어 그럽니다.
걷기를 막 시작한 아이들은 당연히 항상 걷고 싶어합니다.
어떤 것도 아이들을 해치지 않도록 아이들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아이들은 짖궂게 장난치지 않을 테고 엉뚱한 길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아이들을 위한 특별한 공간이 없다는 점입니다.
어른들은 어딘가 앉고 누우며 아이들도 또한 부모와 더불어
그곳에 있습니다.
만일 그 방 안에 물건이 많이 있다면,
어린 아이는 그게 무언지 살펴보며 알고 싶어합니다.
아이들 눈에 째깍거리는 시계가 눈에 띄면, 아이들은 궁금해집니다.
째깍거리는 소리가 나게 하는 무엇이 안에 들었는지 아이들은 열어보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어찌 아이들이 장난끼가 심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알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물건들로 가득찬 방에다 아이들이
있도록 내버려두는 일은 우리 어른들의 잘못입니다.
나는 일 나가고 없는 부모를 둔 백인 아이들을 관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부모들은 그 어린 아이 하나를 오직 몇 점의 장난감과 더불어 지내도록
했습니다.
그 애는 어디도 가지 않고서 그 방안에서 분주하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목욕시간과 식사시간에 어른 한 사람이 와서 음식을 주고 아이를
목욕시켰습니다. 그러곤 다시 아이는 그 방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아이는 어떤 장면도 연출하지 않으면서 거기에 가만히 머물렀고 결코
부모들을 성가시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와는 달리 우리 아이들은 항상 어른들이 몸을 움직이도록 해줍니다.
아이들은 항상 한껏 주목을 받습니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주 커다란 잘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습관처럼 그렇게 하며 그렇게 하는 데 아무런 잘못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아이들을 너무 지나치게 돌보지 말라는
취지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아이들에게 일정 정도의 자유를 주세요.
아이들이 얼마 동안 그들의 방 안에 혼자 있도록 내버려 두세요.
아이들은 점차로 스스로의 힘에 의존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 장난꾸러기 된다고 말하는 데도 여러분의 자녀들이 도무지 가만히 있으려고 하질 않는다면 아이들을 스포츠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그런 점을 교정시킬 수 있습니다.
만일 아이들에게 장난감이나 운동기구가 좀 있다면 아이들의 마음도 적절히 순화될 것입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짖궂다고 걱정해선 안됩니다.
왜냐하면
장난꾸러기 아이들은 활동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은 오히려 조용한 아이들을 걱정해야 합니다. 그런 아이들은 장차 게을러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장난꾸러기라 알려진 아이들을 부디 벌주지 마세요. 장난꾸러기 아이들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적극적이 되게끔 변화시켜 보세요. 이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여러분이 분노와 증오로 불타고 있을 적에 아이들을 벌주는 일은 옳지
않다는 점을 부디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아이들은 잘못을 저지르길 원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아이들에게 우선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일러주세요.
그러다 보면 아이들은 결코 그 짓을 다시 반복하진 않을 겁니다.
보통 아이들은 부모들에게 사랑받고 싶어합니다.
만일 아이들이 좋지 않은 짓을 할 경우
어른들이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리란 점을 안다면,
아이들은 틀림없이 스스로 그런 행동을 멈춥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 사이에 꽃피는 사랑과 친절의 마음은 어느 경우나
영원한 미덕을 함양하기 위해 따라야 할 올바른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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